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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blog] 필리핀 골프장서 샷 잘하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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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세월은 영웅의 동상에도 녹이 슬게 합니다. 아무리 유명했어도 40년쯤 지나면 기억은 퇴색합니다. 잠시 스쳐간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겠죠. 예외는 있습니다. 신동파(64) 대한농구협회 강화위원장이다. 필리핀 40대 이상 국민 중 신동파를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20대 중에서도 절반은 이 이름을 안다고 현지인 가이드가 전합니다. 필리핀 알래스카팀(프로농구팀)의 돔 오르바노(68) 심판위원에게도 물었습니다. 그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너무 잘 안다. 대단했다. 슛 성공률이 90%를 넘었고, 슛을 쏘는 위치는 지금의 3점 라인보다 훨씬 멀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눈이 촉촉히 젖었습니다. 1969년 아시아선수권에서 50점을 쏟아 붓던 신동파를 떠올리는 것 같았습니다.

신동파는 요즘도 필리핀에서 귀빈 대접을 받습니다. “올해도 세 차례나 초청받아 다녀왔다”는 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지 34년이 됐는데도 나를 기억한다는 게 신기하다. 필리핀에 가면 고향에 간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가 경기장에 나타나면 누군가 달려 나와 귀빈석으로 안내합니다. 전반전이 끝나면 장내 아나운서는 “아시아 농구의 전설 신동파가 왔다”고 소개합니다. 관중은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동파’가 행운의 상징이라는 점입니다. 필리핀 골프장에서는 좋은 샷을 하거나 버디를 잡으면 “나이스 샷” 대신 “동파”라고 외친답니다. 시내버스나 택시 중에는 운전석에 ‘신동파’라고 써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운전사에게 물어 보니 “손님도 좋아하고 일이 잘 풀린다”고 합니다. 실제로 필리핀에서 ‘동파’는 ‘일이 잘 풀린다’는 뜻으로 통한답니다. 프로농구 KT&G의 김호겸 사무국장은 “필리핀에서 농구 쪽 일이 난관에 부닥칠 때 신동파씨 전화 한 통화면 일사천리로 해결된다”고 귀띔합니다. 신기한 ‘동파 효과’입니다.

필리핀에서 축구나 야구는 관심 밖입니다. 오로지 농구입니다. 필리핀에서 최고 직업은 호텔리어(여자)와 농구선수(남자)랍니다. 오죽하면 필리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3개를 꼽으라면 모두 “농구, 농구, 농구”라고 대답하겠습니까. 14일 마닐라 아라니따체육관(2만5000석)에서 열린 대학농구 준결승전은 만원이었습니다.

17일에는 KT&G가 전지훈련 중인 ‘디 아레나’에서 고교농구 지역결승전이 열렸는데 ‘오빠 부대’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필리핀이니 지금도 신동파가 기억되는 모양입니다. 독일의 젊은 축구팬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지도 못했던 차붐과 래리 버드를 얘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닐라=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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