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거품경제>下.도요타와 마쓰다-도요타자동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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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위기는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판이한 결과를 낳는다.도요타(豊田)와 마쓰다 자동차.엔화강세와 거품경제 붕괴는 두 회사의운명을 갈라놓았다.한때 일본 3위의 자동차업체였던 마쓰다는 미쓰비시(三菱).혼다(本田)에 밀려 5위로 처진 끝에 올해는 아예 경영권이 포드자동차로 넘어가버렸다.반면 도요타는 지난해 43%의 시장점유율(경자동차 제외)을 기록,부동의 1위자리를 굳혀 대조를 이루었다.결과만큼 판이하게 달랐던 두 회사의 경영전략은 경기 하강기에 접어든 우리기업 들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자동차는 2만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져 있다.부품 하나에 1엔씩의 비용을 줄인다면 대당 모두 2만엔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87년 도요타자동차의 엔고(高)긴급대책위원회가 발행한「마른 수건도 다시 짜자」는 제목의 사원 교육용 팸플릿의 첫 문장이다.
당시 도요타는 달러당 1엔씩 절상될 경우 연간 65억엔의 손실을 안게되는 그런 때였다.
『부품 한개에 50전이라도 좋다.그래도 연간 63만대를 생산하는 주력차종인 카롤라만으로도 모두 63억엔의 비용을 줄일 수있다.』 도요타의 외주비율은 70%.
도요타시(市)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협력업체와 부품업체들의 협력없이는 엔화 초강세 현상을 버텨내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다. 도요타는 곧바로 과장직급을 폐지하고 팀제로 변경하면서 전문가들을 구매쪽으로 빼냈다.
현장을 누비고 다닌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당초 한대당 비용 절감 목표였던 8천엔보다 훨씬 많은 1만2천엔을 삭감할 수 있었다.
도요타는 은행을 믿지 않는 기업이다.
55년 도산직전에 몰렸을때 도요타는 은행의 외면을 받았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일본은행의 도움으로 간신히 긴급융자를 받았지만 도요타는 생산과 판매부문을 분리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후 도요타는 채권이 일시에 몰려와도 결제가 가능하도록 항상석달치의 매출액에 해당하는 여유자금(현금.예금과 유가증권의 합계,96년 현재 2조3천5백억엔)을 보유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범위안에서 안정적인 투자를 해왔다.
다른 기업과 달리 주거래 은행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 것도과거의 경험때문이다.
도요타도 버블기에 「소비자 만족」을 위해 고급승용차를 중심으로 무려 1만종의 자동차를 생산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버블 붕괴와 엔화 강세라는 더블펀치에 바로 정신을 차리고 남들보다 한발 앞서 「제2차 마른 수건 짜기」에 나섰다.
도요타는 전체 판매의 90%를 20%의 주력차종이 점한다는 점에 착안해 생산차종을 2천~3천개로 줄이고 부품 공용화 비율을 높임으로써 대량생산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또 부품별 개발팀을 차종별 개발조직으로 전환해 신차 개발기간을 48개월(88년)→36개월(92년)→18개월(95년)로 단축했다. 그러면서도 「4년마다 주력모델 변경,1년단위의 마이너모델 변경」원칙은 고수했다.
도요타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하면서도 해고는 하지 않았다.
에토(江藤)홍보실계장은 『지금도 종신고용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한때 2천명까지 올라갔던 3~6개월 단위의 계약직 계절사원은 지금 한명도 없다.
또 신규채용 억제와 퇴직자를 보충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3년동안 1천5백명을 줄였다』고 말했다.
도요타는 이런 과정에서 달러당 80엔의 환율에도 이익을 낼 수 있는 경영합리화를 이룩했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해외현지생산(1백28만대)이 수출(1백16만대)을 초과했다.무재고운동.감량경영.해외진출.막강한 판매조직등 도요타의 성공요인으로 거론되는 것은 많다.
그러나 도요타를 오래 지켜본 경제평론가 야스다 유조(安田有三)는 「위기의식」을 으뜸으로 꼽는다.
도요타 최고 경영진은 입만 뻥긋하면 항상 『현재는 위기』라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도요타는 오일 쇼크와 거품 붕괴등 위기 때마다 시장 점유율이 급신장해 「위기의 철인(鐵人)」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쿄=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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