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로 버블’ 붕괴 … 4분기 평균 90달러대 예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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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 31면

국제유가가 최근 급락하자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한 중개인이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최근 세계 3대 기준 유가가 두 달 남짓 만에 최고치 대비 30% 이상 하락했다.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7월 3일 배럴당 146.29달러(종가 기준)에서 11일 100.87달러까지 31.3% 떨어졌다. 한국 석유 제품 가격과 직접 연결돼 있는 중동 두바이산 원유 값은 7월 15일 배럴당 141.33달러로 최고치를 찍은 뒤 11일 95.56달러까지 32.3% 추락했다. 영국 북해산 브렌트유 값도 최고치(7월 3일 145.66달러)에서 33.9% 주저앉았다.

100달러까지 떨어진 국제유가

원유 가격은 그야말로 무너져 내리는 형국이었다. 상승보다 하락 속도가 더욱 가파르다. WTI를 기준으로 4월 1일 100달러를 넘어 석 달 동안 146달러에 도달했지만, 다시 100달러 선으로 복귀하는 데 두 달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폭등하던 가격이 고점에서 20% 정도 떨어지면 버블 에너지 소진이 본격화한다고 보는 게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가격이 그 정도 떨어지면 실수요보다는 가격 상승의 덕을 보려던 세력(투기꾼)의 이탈이 급속히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나타난 가격 그래프를 보면 종 모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4월 이후 유가 그래프를 보면 전형적인 종 모양이다. 그래서 미 에너지연구소인 오펜하이머의 페이들 가이트는 10일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투기 세력의 게임이 끝났다. 페트로 버블(Petro Bubble·유가 거품)의 붕괴다”라고 말했다.

실제 헤지펀드 등 투기 세력이 대거 이탈하고 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9일 의회에 낸 자료에 따르면 유가가 폭락한 최근 두 달 사이에 투기 세력은 값이 오르면 팔려고 사두었던 물량(포지션)을 털어내고 390억 달러(약 42조원)를 회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유 소비 감소 전망 때문이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일본 등의 경제가 금융위기 여파로 둔화하거나 침체에 빠지고 있다. 중국과 인도 등 이른바 신흥 원유 소비국의 경기도 그다지 좋지 않다. 원유 소비가 지금도 줄고 있지만 앞으로 더 감소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투기 세력이 유가를 끌어올렸던 근거가 소멸하자 이제는 앞다퉈 보유 물량 처분에 나선 셈이다.

하지만 투기 세력의 본류는 아직 시장에 남아 있다. 글로벌 원유시장에는 투기 세력으로 보이는 자금 2200억 달러(약 230조원) 정도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고 미 의회는 추정한다. 일부는 원유 선물에 베팅돼 있고 일부는 대기성 자금으로 원유시장 주변을 맴돌고 있다. 멕시코만 원유 시추 설비들이 허리케인에 피해를 봤다거나 중동지역이 지정학적으로 불안하다는 등의 재료만 있으면 언제든지 국제유가를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돌발 변수의 파장이 오래가지만 않는다면 유가 하락 추세는 이어질 것이란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미 헤지펀드인 마스터캐피털의 대표인 마이클 프라이드는 10일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투기 세력은 돌발 변수를 활용해 유가를 끌어올리기보다 가격 반등을 활용해 보유 물량을 줄여 나갈 가능성이 더 크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올 4분기(10~12월) 평균 유가 예측치도 하향 조정되고 있다. 영국 최대 은행인 바클레이스는 6월 전망치(123.90달러)를 대폭 수정해 지난주 97.50달러로 낮췄다. 로이터 통신이 8일 월스트리트 상품 분석가들의 의견을 조사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 중 가장 많은 사람(57%)이 4분기 평균 유가를 90~97달러대로 점쳤다.

이는 어디까지나 세계경제가 현 추세로 계속 흘러간다는 가정 아래 만들어진 전망이다. 유가를 끌어올릴 돌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끌어내릴 충격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거대 금융회사의 파산이나 미 경제의 급격한 후퇴 등이 불거지면 투기 세력은 원유 투매에 나설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는 투기적 수요가 완전히 사라진 국제유가를 65~70달러 선으로 보고, 이 선까지 내려앉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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