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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심의부터개혁하자>1.경제논리보다 '힘'에 좌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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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회의 가장 큰 기능은 국가예산의 심의.확정이다.「(국민)대표 없는 곳에 과세(課稅) 없다」는 말은 이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금언이다.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정부가 세목을 신설하고세율을 마구잡이로 올려도 국회는 거의 거수기 노 릇이나 해왔다.그러니까 국가예산이 편성.심의.집행과정의 각 단계에서 비효율적으로 운용되고 낭비되고 있다.예산낭비및 왜곡의 주역은 여야를막론하고 잘못된 정치논리다.제도적 장치의 미흡과 의원들의 무성의도 빼놓을 수 없다.15대 국회의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가 예산심의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바른 예산심의를 가로막는 각종 문제점을 심층 진단,9차례에 걸쳐 점검한다.
[편집자註] 지난달 26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오후 3시쯤 나웅배(羅雄培)재정경제원장관실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방문자는 신기하(辛基夏).박광태(朴光泰)의원등 광주출신 국민회의소속 현역의원 5명.이들은 광주 도심통과의 철도 이설공사에 대한 차질없는 정부예산 배정을 요구했다.
예산실 관계자들은 이 요구가 근본적으로 타당치 않다고 말한다.도심구간의 철도를 옮기는 사업은 국가가 아닌 해당 지방자치단체 몫이다.도심 철도부지는 대개 땅값이 비싸므로 이를 팔아 그돈으로 외곽에 싼 땅을 구입,철도를 옮기면 된다 .
그러나 정치논리는 경제논리보다 힘이 세다.그리고 정치논리의 승리 뒤에는 헐거운 경제논리가 도사리고 있다.광주 의원들이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이미 88년 고인이 된 심명보(沈明輔.강원영월-평창)의원이 영월역 이전공사 사업비중 27%를 국고에서 보조받아간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한번 구부러진 경제논리는 이처럼 원래대로 펴기 어렵다.그 사이 국가예산은 원칙없이 뿌려지고 있다.이미 진주시.하동군등도 출신 의원과 공무원들을 총동원,재경원에 광주시와 똑같은 요구를하고 있다.
이런 억지의 틈새에서 「유능한 국회의원」「유능한 자치단체장」이 자라난다.이유와 과정은 어쨌든 예산만 따오면 된다는 사고가판치고 있다.「국가예산은 먼저 가져가는게 임자」라는 사고가 상식화되고 있다.광주 의원들은 이날 재경원 청사 앞에서 늠름하게「증명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다음날 지방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정치적 목적의 「예산 구부리기」는 여당이 원조다.95년초 김종필(金鍾泌)민자당대표가 탈당,6.27 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이 충청권을 휩쓸자 여권 은 커다란 위기감에 직면했다.이 위기감의산물이 96년 예산안.
95년 10월 재경원은 충청권에 대한 파격적인 배려가 특징인96년 예산안을 제출했다.총공사비 1백억원이상을 투입하는 28개 신규사업중 충남에만 4개가 떨어졌다.특히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총공사비 1조6천2백96억원),당진~대전간 고속도로(1조2천83억원),당진~서천간 고속도로(1조1천1백50억원)등 1조이상 초대형 공사가 3개나 됐다.
이로써 96년 착수하는 신규 대형사업중 충청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영남권의 45%에 이어 30.8%로 껑충 뛰어올랐다.파격적인 충청 후대의 목적은 4.11총선에서의 신한국당 교두보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황명수(黃明秀)도지부장을 정점 으로 하는 충남출신 민자당 의원들은 『예산 안주면 총선에서 다 떨어진다』며 재경원.청와대.중앙당 정책위를 집중 공략했다.
선거.정치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경제전문가도 「무식하게 용감해진다」.올 4월 청주상당에서 출마한 신한국당 홍재형(洪在馨)후보.직전 부총리겸 재경원장관이다.
洪후보는 총선당시 홍보물에서 『재경원장관으로 있으면서 충북지역에 배려한 예산이 5천억원이상』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부산 제2종합무역전시장은 정치논리로 입지가 변경됐다가 사업이표류하고 있는 사례다.제2종합전시장 사업은 당초 90년 일산 신도시및 영종도 신공항 건설과 함께 입안됐다.일산에 2만평 부지까지 확보했다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취임후인 93년 입지(立地)재고론이 제기됐다.수도권인구 집중완화와 지역균형개발을 위해부산에 짓자는 주장이었다.
같은 여당 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사업을 안빼앗기려는 이택석(李澤錫.경기고양)의원과 부산으로 끌고가려는 강경식(姜慶植.부산동래갑).김운환(金운桓.부산해운대)의원이 국회.정부를 무대로한판 붙었다.결국 현정권의 고향인 부산의 승리로 판가름났다.
이 사업은 그러나 3년째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막상 부산으로결정됐음에도 전시장이 들어설 수영만 비행장 부지매입이 흐지부지하기 때문이다.이 사업에 배정된 94년부터의 3년간 예산 2백억원은 여전히 은행금고에서 잠자고 있다.
전북 김제.부안 일대에서 공사중인 새만금사업은 여야 성층권에서 결정된 정치성 선심사업.총공사비 3천억원이상의 대형 공사이나 공업용지도 아닌 농업용지 확보를 위해 그 정도 돈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 지역안에서도 양론이 있다.그 돈을 전북에 쓸 것같으면 차라리 용담댐 조기완공등 다른 사업에 써야 한다는 사람도 만만찮다.
이 사업은 91년 김대중(金大中)당시 신민주연합당 대표가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의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따낸 것이다.사업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됨에도 예산은 계속 퍼부을 수밖에 없다.
정치논리만 예산을 왜곡시킬까.예산당국도 문제다.10월2일 예산안이 국회에 넘어감과 동시에 칼자루는 재경원에서 국회로 넘어가고 재경원도 예산통과를 위해 「예산 구부리기」의 방조자가 된다. 국회는 지난해 12월 대구.여수공항 확장,대전.광주지하철공사,울산.포항 신항만공사등 누가 봐도 선심성임이 뻔한 예산들을 9백90억원 증액해 통과시켰다.국회에서의 예산심의중 사업신설과 사업비 증액은 정부의 동의사항.예산안 통과에 급 급한 정부가 선심성 사업들을 허락해준 것이다.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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