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서울에 온 세기의 미남배우 알랭 들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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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70년대 말까지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잘 생긴 남자는 일단「아랑드롱」으로 통했다.정확한 발음은 「알랭 들롱」이지만 아랑 드롱은 실제인물과 관계없이 미남의 대명사로 한국인들이 애용하는 기호였다.지금은 그의 이름을 아는 신세대도 드물거 니와 잘생긴 남자를 대표하는 영화배우도 없다.그만큼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에접어든 것이다.이제 알랭 들롱은 60년대 대형스타시대를 장식한영화배우중 마지막 현존인물의 하나로서 중.장년팬들에게 흘러간 청춘을 상징해주는 추억으로만 남게 됐다.그 알랭 들롱이 25일내한해 2박3일의 바쁜 일정을 보내고 27일 돌아간다.올해 61세로 환갑을 넘긴 그는 조금 늙었지만 날씬한 모습이 보기좋은「젊은 할아버지」인상으로,미남의 환상이 깨질까봐 우려해온 올드팬들을 안심시켜 주었 다.『여전히 건강하고 젊어보이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일을 좋아하고 파시옹(열정)을 가지면 누구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의 첫 방한목적은 영화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와 코냑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다.그와 한국팬들의 첫대면은 극장이 아닌 제품판촉을 위한 백화점 사인회장에서 이뤄졌다.『한국사람들이 좋아해줘서 무척 기쁘다.이 나라에서 내가 미남의 대명사인 걸 알았으면 진작 왔을텐데』라고 첫소감을 말한 그는 『한국에는 당신의 여성팬이 특히 많다』는 말에 『일정이 바빠 여성들과 친밀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떠나기전 꼭 친밀한 시간을 갖고싶다』고 조크를 던졌다.재기넘치는 그의 유머는 스타에게서 느껴지게 마련인 거리감을 줄여주는 힘이 있었다.『슬퍼보이는 눈빛에 매혹된 팬들이 많은데 의도적인 것이냐』고 묻자 『눈빛은 그사람의 영혼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받아넘겼다.
57년 『여자가 관계될때』로 데뷔한 그는 59년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 스타가 됐고 39년간 8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최근에는 멕시코에서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 원작의『나이트앤드 데이』를 찍었고 올 9월엔 파리에서 연극도 한다.그러나 그는 연기보다는 사업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화장품.코냑 등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한 회사들로부터 브랜드 로열티를 받는 사업에서 그는 이미 세계적인 비즈니스맨이 돼 있고 렘브란트.들라크루아등 거장들의 미술품수집에도 열을 올리고있다.배우로서 언제 은퇴할 거냐고 묻자 그는 『영화는 내 삶 그 자체다.그러나배우가 영원한 직업이 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이름이란 사람이 죽으면 잊혀지게 마련이다.죽은뒤에도 이름을 남기기위해 나는 상품에 이름을 새기는 방식을 택했다』고 답했다.
그는 『60~70년대 전성기때가 진짜 영화의 시대였다.그러나지금은 텔레비전이 영화를 대체해버렸다.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전성기때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면 더 큰 인기를 얻었지 않았겠느냐』고 묻자 『나는 미국이 싫다.할리우드에정착하기에 내 기질은 너무 프랑스적이고 라틴.유럽적이다』라고 답했다.그는 부자다.스위스 제네바에 50㏊짜리 대저택이 있고 파리와 그 근교에 또다른 두채의 집이 있다.이 집들에서 그는 6년째 모델출신의 네덜란드인 부인 로잘리(28)와 함께 산다.
『여성은 내 감수성과 예술의 영원한 원천』이라고 말하는 그는 공연한 여배우마다 염문을 퍼뜨리며 여성편력을 자랑했지만 다른 할리우드스타들에 비하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다.공연 여배우중가장 기억에 남는 이를 묻자 『로미 슈나이더가 첫째고 다음이 브리지트 바르도』라고 대답했다.22세때 슈나이더로 시작된 여성편력은 나탈리 발드로미.미레유 다르크등 두 여배우와 결혼.동거로 이어진 끝에 90년 현재의 부인과 재혼한 것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
다섯살난 딸 아누슈카에 이어 94년 늦둥이 아들 파비앵을 낳아 노익장을 과시한 그는 『사람이 한 분야에 평생을 바칠 수 있으면 성공한 것인데 나는 배우로서 평생을 바친만큼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며 『앞으로 남은 소원은 두 자식이 잘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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