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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원한다면 죽음을 준비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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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04면

1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모현의료센터 호스피스 병동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작곡가 조념씨.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열정적인 연주를 들려준 그는 매일 니체의 전집을 정서하며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 고향 돗토리 시내에 임종 전문병원 ‘들꽃 진료소’를 세우고 불치병 환자들이 웃으며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일본인 의사 도쿠나가 스스무(오른쪽).

모현의료센터에서
초가을 햇살이 낯을 기분 좋게 간질이던 3일 오후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모현의료센터(모현호스피스www.mhh.or.kr) 병동에 바이올린 선율 한 가락이 울려 퍼졌다. 이틀 전 입원한 조념(86· 한국작곡가회 수석고문) 할아버지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활을 긋자 병실 한구석이 무대로 변했다.

해방 뒤 1세대 작곡가로 활동해온 조념씨는 폐의 40%만 제 기능을 할 만큼 쇠약해지자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인 이곳 모현의료센터(센터장 박삼화 스텔라 수녀)를 찾았다. 일제강점기에 도쿄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한하운 작시의 ‘보리 피리’, 정치근 작시의 ‘나의 조국’ 등을 작곡하며 민족혼을 북돋웠던 그는 이제 자신의 마무리를 향해 한 순간 한 순간을 채워 가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이 책을 정서했지요”라며 조씨가 들어 보여주는 책은 뜻밖에도 ‘니체 전집’이었다. 누렇게 색이 바랜 책장 갈피마다 그가 젊은 시절 뜨겁게 호흡했을 철학자의 육성이 담겨 있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를 말한다. 환자가 여생 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하도록 신체적·정서적·사회적·영적으로 돕는 일이다. 이별의 시간 앞에 선 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누그러뜨리는 총체적인 돌봄이기도 하다. 박스텔라 센터장은 “일그러진 얼굴로 들어왔던 환자가 하루 이틀 지나며 환한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 호스피스가 얼마나 소중한 마지막 치료의 단계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고 했다.

병실마다 붙어 있는 민들레·제비꽃·물망초 같은 예쁜 꽃말 아래에는 환자명과 함께 그들의 바람이 적혀 있다.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생각해 주오’ ‘사랑의 기쁨’···. 모현의료센터가 매달 1일 발행하는 소식지에는 거의 매일 선종(善終)한 환자의 이름이 실린다. 종교를 가리지 않고, 특히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이 호스피스 병동은 후원회와 기부자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환자들을 목욕시키고 팔다리를 주무르며 말벗이 되는 이들도 자원봉사자다. 조용한 임종실은 없고 화려한 영안실만 있는 한국 사회, 돈만 있으면 의료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한국인에게 모현의료센터는 호스피스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연구한 책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애쓰는 이런 이들의 노력 덕일까. 국가도 몰라라 하고, 가족도 짐으로 여기는 말기 환자들을 위한 연구서가 여러 권 나왔다. 우리보다 먼저 차원 높은 ‘죽음의 질’에 집중해온 미국과 일본에서 발행된 번역서가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한국 필자가 쓴 책도 선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해피…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최철주 지음, 궁리 펴냄)는 존엄사에 관한 문제제기와 보도로 주목받았던 전직 언론인의 보고서다. 국내외 현장을 발로 뛴 탄탄한 취재에 10년 가까이 한 호스피스 활동 체험이 더해져 읽는 이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여기에 죽음의 문화가 빈약한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예리한 비판, 오랫동안 우리 삶의 질이 오로지 경제에만 집중돼 있었다는 질타가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실감 나는 상황과 장면 묘사 또한 이 책이 던지려는 메시지를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

『해피…엔딩,』에도 언급된 죽음학 연구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이진 옮김, 이레 펴냄)은 1969년 저작으로 40년 가까이 지나 국내에 도착했다. 말기 환자 500여 명을 인터뷰해 죽음을 앞둔 사람이 겪는 다섯 가지 심경의 변화 단계를 정리한 죽음학 연구의 고전이다.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이 전하는 위대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환자가 자신의 병을 알게 된 뒤 보이는 첫 단계는 ‘부정과 고립’이다. 일종의 쇼크 상태에서 ‘그럴 리가 없어’라며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둘째 단계는 ‘분노’다. ‘왜 하필이면 나일까’에서 시작해 화를 내고 광기를 부리며 원한을 품는다. 제3 단계로 ‘협상’의 시간이 찾아온다.

피할 수 없는 일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은 공손한 부탁의 순간이다. 넷째 순서는 ‘우울’이다. 더 이상 병을 부정할 수 없게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고 주변에서 수술이나 입원을 강요하면 엄청난 상실감에 빠진다. 마지막에 가면 ‘수용’한다. 죽음을 앞둔 환자는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서 급속도로 주변에 대한 관심을 잃고 홀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매일 매 순간 죽음을 접하는 의사들의 경험담은 그 자체가 드라마다. 일본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가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온다는 도쿠나가 스스무(德永進)가 쓴 『들꽃 진료소』(한은미 옮김, 김영사 펴냄)를 읽다 보면 불치병 환자들이 왜 ‘이런 의사 앞이라면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지 알게 된다. 그는 10대 말에 이미 ‘누구나 결국은 죽는다. 그러나 혼자 죽어가는 것은 외로울 것 같다.

죽음의 순간 옆에서 지켜주며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타고난 임종 전문 의사다. 고향인 돗토리 시내에 그가 세운 ‘들꽃 진료소’는 모든 사람이 ‘자신답게 살다가 자신답게 죽어가는 것’을 돕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암과 같은 불치병을 알려야 할 때 환자에게 ‘선고’나 ‘고지’ 같은 단어 대신 “고백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도 이별이 서툴다-죽음에 대한 어느 외과 의사의 아름다운 고백(Final Exam)』(폴린 첸 지음, 박완범 옮김, 공존 펴냄) 또한 생명의 마지막 파수꾼인 의사의 임종 일지다. 의사에게 주어진 ‘최후 과제’라 할 삶의 마지막에 놓인 환자 돌보기 경험을 모았다. 15년에 걸친 ‘임종 보살핌(end-of-life care)’ 끝에 그가 다다른 결론은 이렇다. “삶을 원한다면 죽음에 대비하라. 죽음 대비는 가장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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