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샐러리맨은 그를 보며 꿈꾼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코노미스트 수출 전선의 세일즈맨에서 연봉 33억원을 받는 샐러리맨의 우상이 됐다. 지금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경영하는 오너. 윤윤수 휠라 회장의 이력서다. 성공의 주술에라도 걸린 듯하지만 정작 본인은 살아온 이야기의 절반이 실패담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휠라를 세계 3대 스포츠 브랜드로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외국 브랜드를 사들여야 합니다. 지금도 시장에 나오는 유명 브랜드가 많아요. 이탈리아 것이면 어떻고 프랑스 거면 어떻습니까? 돈 주고 우리 것으로 만들면 되죠.”

윤윤수 휠라 회장은 “외국의 브랜드를 사들이는 것이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그가 인수한 휠라는 이탈리아 브랜드다.

그래서 한국인 소유이지만 국가 대표팀을 지원한다면 이탈리아 대표팀을 후원해야 한다. 회사의 기본 방침이다. 휠라의 정체성이 이탈리아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휠라 제품의 80%는 시장 특성에 맞게 현지화한 것들이다. 글로벌하게 생각하고 지역에 맞게 실행(Thinking globally, acting locally)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인이 휠라라고 할 때 떠올리는 제품이 약 20%입니다. 대부분 테니스 용품이죠. 이들 제품이 휠라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머지는 각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해 팔게 하고 본사 차원에서는 조율만 합니다.”

그는 한국 고유의 브랜드에 집착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한국 기업도 미국·프랑스 등 선진국 브랜드를 파는 비즈니스를 해야 돈을 버는 게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먹고사는 데 기여하려면 정상급 브랜드를 달고 세계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윤 회장이 휠라라는 외국 브랜드에 편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그가 휠라의 라이선스 사업자로 참여하면서 스포츠 의류 브랜드 휠라는 스포츠화 시장에 진입한다. 제품 포트폴리오에 없던 신발은 지금 의류보다 더 큰 휠라의 비즈니스가 됐다.

무(無)에서 시작한 한국 시장은 윤 회장 덕에 휠라의 효자가 됐다. 휠라코리아는 전 세계 휠라 판매법인 중 가장 많은 이윤을 냈다. 10년 동안 본사에 보낸 로열티만 2억5000만 달러. 그새 그의 연봉은 20억원으로 올랐고, 차도 벤츠600으로 바뀌었다.

전문경영인으로서 연봉 33억원을 받은 적도 있다. 2005년 윤 회장은 경영자 기업인수(Management Buy-out) 방식으로 휠라코리아 지분을 100% 확보한다. 오너로 변신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왜 한국에서만큼 못 팔까” 아쉬워하던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휠라 지주회사의 최대주주인 미국 사모펀드 서버러스가 휠라 본사를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수익 악화로 경영이 어려워진 탓이었다. 지난해 3월 그는 휠라 본사를 인수했다. 4억 달러에 달하는 인수 대금 중 4분의 3은 외환은행에서 빌렸다.

이 돈을 빌리기 위해 그는 중국·남미·유럽·일본 등의 판매법인으로부터 브랜드 사용 로열티의 일부를 선불로 받아내기로 했다. 윤 회장의 경영능력과 진실성을 믿은 판매법인들은 그가 휠라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선 로열티를 지급하겠다는 의향서에 서명했다.

이 의향서를 모아서 외환은행을 찾아갔다. 이렇게 해서 인수 자금의 대부분을 은행에서 조달하고 선 로열티를 받아 그 빚을 갚아 나가는 거래 계약이 성사됐다. 이런 방식의 기업 인수는 한국 금융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윤 회장이 본사를 인수할 엄두를 낸 것은 이렇듯 그 나름의 비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과, 자신이 정통한 미국 시장은 직접 커버하고 나머지 시장은 라이선스를 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 5년이었던 현지 법인들의 라이선스 계약기간을 장기로 조정해 줬다.

“내가 겪어봐서 잘 알지만 라이선스를 받은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계약이 끝나면 라이선스를 회수해 갈까 봐 투자도 과감하게 못해요. 그래서 7%의 로열티 중 3%만 선불로 받는 대신 장기 로열티를 주겠다고 했죠. 안정성과 선 로열티를 맞교환한 거예요. 그렇게 받아낸 돈으로 지난 2월 말 은행 빚을 다 갚았습니다.”

외환은행과 약속한 상환 시한이 지난 6월 말이었는데 넉 달 앞당겨 전액 상환한 것이다. 리처드 웨커 행장이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외환은행의 광고를 찍자고 해 그는 외환은행의 광고 모델이 되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에게 신용이라는 자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용을 쌓는 데 발판이 된 것이 외국인과의 네트워킹 능력이다. 휠라는 세계적인 브랜드지만 전 세계 휠라를 움직이는 것은 윤윤수라는 브랜드다.

그가 휠라 본사를 인수할 당시의 일이다. 인수를 지원한 삼성증권 측이 참여 결정을 내리기 전 석 달 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고 나서 내린 결론이 “윤윤수라면 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윤 회장은 요즘 휠라코리아 경영을 이기호 사장에게 맡기고 휠라 본사의 경영을 호전시키는 데 몰입하고 있다. 그를 인터뷰한 8월 18일 아침엔 미국 법인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1000여 개의 매장을 거느린 미국 최대 백화점 콜즈에 들어간 신발이 진열한 지 9일 만에 1만7000족 팔리고 그 후 3만7000족이 더 팔렸다는 것이다.

“대성공이에요. 아침에 그 연락 받고 난리 났습니다. 비로소 미국 법인이 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죠. 우리가 휠라 본사를 인수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휠라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달에 콜즈 매장에 의류를 론칭하는데 미국 법인 정상화의 분수령이 될 겁니다.”

그는 이런 익사이팅한 맛에 사업을 한다고 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없을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느냐고 묻자 “그거야 알 수 없지 않으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그는 살아온 이야기의 절반이 실패담이라고 말한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그의 장래 희망은 판검사였다. 유학파 출신의 한학자였던 아버지의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가 고교 2학년 때 폐암으로 별세했다. 병상의 아버지는 그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리셨다.

충격을 받은 그는 이과로 옮겨 서울대 의대에 지원했다. 2지망으로 치대에 붙었다. 치의예과를 8개월 다니다가 그만뒀다. 치대를 나와서는 아버지 같은 환자를 살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삼수까지 했지만 서울대 의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후기인 한국외국어대 정외과에 진학한 그는 친구 대신 시험을 치르다 적발돼 무기정학을 당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는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외무고시를 준비해 1차에 합격했다. 2차는 포기했다.

“나이 서른에 외시에 붙으면 뭐합니까? 취직하기로 마음먹고 해운공사(한진해운의 전신)에 들어갔다가 2년 만에 무역 일을 하기 위해 사표를 던졌죠.”미국 유통업체 JC페니에 들어간 그는 수완을 발휘했고, 서른여섯에 신발제조업체 ㈜화승에 최연소 수출담당 이사로 스카우트된다.

잘나가던 그는 그러나 3년 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화승을 떠난다. 영화 ‘ET’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ET 인형을 만들었다가 회사에 60만 달러의 손실을 입히고 난 뒤였다.“저작권에 무지한 탓이었죠. 미국행 배에 인형 10만 개를 선적했는데 결국 한 개도 못 팔았습니다.”

무역회사를 차린 그는 마침내 휠라와 인연을 맺는다. 그가 주문한 신발을 휠라 브랜드로 팔고 신발 사업에 관심이 있던 쌍용이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 그는 이 아이디어로 신발을 1억 달러어치 이상 팔았다. 당시 종합상사들이 이 비즈니스 모델을 스터디했다고 한다.

휠라 본사 인수 기법과 더불어 윤 회장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실패를 통해서 많은 것을 학습했다고 말했다. “숱한 실패를 겪으면서 프라이드가 땅에 떨어졌지만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겸손과 인내심이죠. 서울대 의대에 들어갔다면 어쩌면 한심한 인간이 됐을지도 몰라요.”

젊은 세대에게 그는 “세상이 아무리 암울해도 길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88만원 세대’라고 하는데 통계적으로는 수긍이 가는 분석일지 몰라도 그런 통계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룸이 있게 마련이죠. 끝이다 싶을 때가 있지만 지나고 나서 뒤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보입니다. 끝이 아니라는 증거죠.”

윤 회장의 경영철학은 정직, 성실, 페어플레이 그리고 정보의 공유다. 정직과 성실은 그에게 신용이라는 보상을 안겨줬다. 선순환이랄까? 비즈니스를 시작할 당시엔 불리한 듯싶었지만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과 일치했다.

경영의 키워드는 속도다. 2001년엔 이해익 리즈경영컨설팅 대표 컨설턴트와 칼럼집 『생각의 속도가 빨라야 산다』를 공저했다.“내가 보고 들은 것을 짧은 시간에 직원들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속도감 있게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매진할 수 있죠. 빠른 속도야말로 성공의 열쇠입니다.”

그가 이탈리아 브랜드 휠라를 사들인 것도 속도를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브랜드를 만들어 브랜드 가치를 축적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무엇보다 우리의 문화가 받쳐줘야 한다. 한국 브랜드가 세계적인 것이 되려면 우리 문화가 세계를 리드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양궁선수들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신기에 가까운 기록을 올린 데는 국산 양궁 브랜드 ‘SAMICK’이 한몫했다. 삼익은 삼익악기 양궁사업부의 후신인 삼익스포츠가 만드는 활로 선수용이다. 매출액은 연간 50억원 규모. 베이징 올림픽에서 삼익의 ‘선전’으로 삼익악기까지 브랜드 가치가 올라갔다.

국산 브랜드를 세계화하는 시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필요하죠. 그런 브랜드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것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활을 잘 만든다는 것은 확실히 프라이드를 느낄 만합니다. 그런데 활 팔아서 대한민국 국민이 먹고사는 데 기여할 수 있겠어요? 더욱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시간이 돈인데.”

휠라의 브랜드 가치에 대한 그의 기여도는 얼마나 될까? 의류와 신발로 나눌 때 신발 브랜드로서 휠라에 대한 그의 기여도는 90% 정도로 평가된다.

미리 새긴 묘비명은 ‘열심히 일하다 간 사람’

휠라의 엔리코 프레시 전 회장은 생전에 “휠라는 이탈리아에서 탄생했지만 성장은 한국에서 했다”고 평가했다. 성장을 주도한 사람은 물론 윤 회장이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한국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랬듯이 글로벌 브랜드 휠라를 관리하고 글로벌 시장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윤 회장은 아침형 인간이다.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7시15분이면 출근한다. 휠라 본사를 인수할 당시엔 24시간 일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지난 2년 동안 해외 출장만 서른 번가량 다녔다. 그는 오너가 된 후 중압감이 크다고 했다. 윤 회장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의 궤적을 쫓으면서 윤 회장은 “나도 가진 것 없이 할 수 있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수출 전선의 세일즈맨에서 국내 최고의 연봉을 받는 전문경영인을 거쳐 세계적인 브랜드를 경영하는 오너로 변신한 윤윤수. 그는 후세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랄까? 묘비명을 미리 새긴다면 어떻게 쓰겠느냐고 물었다.

“‘열심히 일하다 간 사람’이라고 써 주면 족하죠. 그 전에 나이키-아디다스에 이어 휠라를 세계 3위의 글로벌 브랜드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서 좀 쉬었다 가야죠.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윤윤수 회장이 말하는 ‘하우 투 브랜드’

□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와 경험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 나온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패를 회피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돈도 날려봐야 벌 수 있다.

□ 자기 희생의 리더십을 발휘하라
리더의 자기희생이 구성원 간 공감대를 만들어 낸다. 나는 오너가 되고 나서 연봉을 20억원에서 5억원으로 깎았다. 벤츠를 처분하고 체어맨을 렌트했다.

□ 네트워킹 능력을 키워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특히 외국인과의 비즈니스가 낯설지 않아야 한다.

□ 성공의 열쇠는 속도
생각의 속도가 빨라야 성공한다. 구성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속도를 당신의 속도에 맞춰라.

이필재 편집위원 jelpj@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