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당신은 소중하니까, 레이디 퍼스트”

중앙일보

입력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의 말뜻은 남녀노소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여성이 먼저’라는 의미다. 우리는 종종 이 말을 사용한다. 차에 올라타거나 문에 들고 나설 때, 때로는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때도 남자들은 미소와 함께 기꺼이 손을 앞으로 뻗으며 “레이디 퍼스트”라는 말을 날린다(솔직히 요즘은 그렇게 자주 접하는 말이 아니다. 가장 많이 듣는 때는 술자리에서인데, 폭탄주를 마실 때 유래와는 거리가 멀게 짓궂은 의미로 주로 쓰인다).

이 말이 언제 처음 시작됐는지 알아보려고 네이버 검색을 이용했더니 아이디 yick님은 “영국의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남긴 ‘기사도 정신’에서 출발했다”고 적었다. 오, 기사도 정신! 사실 어원이야 어떻든 여성을 존중하고 또 여성은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배려 정신’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라면 누구나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한번쯤 아내와의 일상에 비추어 이 말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나 생각해 보자. 단언할 수는 없어도 대부분의 가장들에게 이 말은 아내를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필요한 적이 없던’ 말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외국 여행길에서 만나는 ‘참 좋은 풍경’ 중 하나로 중년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꼽는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발걸음도 시원찮지만 두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을 부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며 “우리도 저렇게 늙자” 아내와 약속했던 적이 분명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서 또 다른 모습을 본다.

식당이나 카페 또는 비행기 안이든 어느 곳에서나 누군가 그들에게 의향을 물을 때면 늘 남편이 아내에게 먼저 묻는다. “당신은?” 그리고 질문한 이에게 아내의 선택을 먼저 알려준다.

당신은 어떤가? 내 것만 혹은 내 것부터 먼저 말하고 이후의 상황은 종료되지 않나? 대부분의 한국 가장들에게 ‘퍼스트’는 자신 또는 아이들일 뿐이다. 좋게 말하면 아내의 개성과 독립성을 존중해서 괜히 끼어들어 선택을 ‘종용’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아내는 퍼스트도 라스트도 아닌 그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레이디 퍼스트’의 어원을 찾을 때 네이버 카페 ‘정의로운 심장을 가진 남성연대’에서 이렇게 설명한 것을 보았다. “13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유럽에서 관습적으로 모든 시위나 봉기에 있어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전초대가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했던 역사가 있다. 이때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선봉대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거리의 남성 행인들에게 시위에 참가하라고 독려하면서 ‘여성이 앞장서면 남성들이 따라올 것이다’는 구호로 시위를 주도했고 이것이 ‘레이디 퍼스트’의 어원이다.”

생각해 보라. 당신의 아내는 당신을 비롯한 아이들, 집안일에 늘 먼저 행동했다. 당신이, 아이들이 귀찮게 여기는 것까지도. 그런 아내에게 당신이 기꺼이 즐겁게 기사도 정신을 발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중앙선데이 77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