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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만 요란한 自淨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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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1년 초의 일로 기억한다. 국세청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은행 계좌를 여럿 만들었다. 일선 세무공무원들이 민원인들에게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았으나 돌려줄 마땅한 방법이 없을 경우 입금토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달포가량 지난 후 국세청은 상당한 금액이 입금됐다고 했다. 이 돈을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하겠다는 설명과 함께. 웃어넘기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세청은 세무 공무원에게 금품을 건넨 기업 6곳에 대해 자신의 '약점' 때문에 공무원을 매수한 것으로 보고 특별세무조사를 했다.

국세청장과 세무서장들은 자신과 부하들의 부조리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자정(自淨)'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것이다. 일부 직원이 국세청에 몸담은 사실 자체를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부조리나 비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해 이런 노력은 한계가 있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부정과 비리가 잇따랐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 후 '몸통'을 건드린 개혁을 단행하자 사정은 사뭇 달라졌다. 담당자 한 사람이 모든 업무를 전담해 처리함에 따라 재량권이 커지고 유착의 소지가 있었던 점을 주목해 '지역 담당제'를 폐지한 것이다.

이랬더니 연간 부조리 발생 건수가 70%나 감소했다고 한다.

한참 지난 얘기를 들춰내는 것은 요란한 전시행정만으론 비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정말 깨끗한 조직을 만들고 싶다면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병인을 찾아 수술하기보다 손쉬운 자정운동에 의존한다.

동성여객 금품 로비 사건으로 시장이 자살하는 등 홍역을 치렀던 부산시도 이런 예에 속한다.

부산시는 최근 '클린 시정 자정 결의대회'를 열고 공무원이 뇌물이나 향응 접대를 받은 사실을 신고하면 받은 금액의 10배를 포상금으로 주겠다고 발표했다.

오죽했으면 이런 극약 처방까지 내놓았을까. 지난 총선에서 봤듯 신고포상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성여객 사건의 본질이 뭔가. 동성여객 측이 부산시.국세청 등을 상대로 버스 노선 조정 등 사업상 편의를 봐 달라며 전방위로 뇌물을 뿌린 의혹이다. 그러니 노선 배분에서 특정 공무원의 입김이 작용할 소지를 없애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다음 시정 곳곳에 부패의 소지가 없는지 살펴 보고 대책을 마련하는 게 순서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일선 시.도는 70, 80년대부터 자정운동을 해왔다. 전국 시장.군수들은 2003년 초에도 윤리강령을 정하고 자정운동을 벌였다. 그런데도 왜 비리가 끊이지 않는가. 자정운동하는 사람 따로 있고 돈받는 사람 따로 있다는 얘기인가.

재계도 수없이 투명경영과 자정결의 대회를 열었지만 검은 돈과 정치권의 부패고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전경련은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불법정치자금을 주지 않겠다"고 다시 선언했다. 누가 믿겠는가.

지난 3월엔 위스키 업계 대표까지 나서 거래업체에 리베이트성 현금 제공이나 해외관광 및 골프 접대 등을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처럼 수많은 자정운동이 실천으로 연결됐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비리와 부패의 무풍지대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사정은 영 딴판이다.

최근엔 용산역 주변 성매매 업주들이 경찰관들에게 상납한 의혹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이젠 실속 없는 자정운동은 그만두자.

박의준 정책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