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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의 독, 이념적 양극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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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50년 전 미국 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모든 면에서 비슷한 소년 22명을 오클라호마 로버즈 케이브 공원으로 데려갔다. 그러곤 두 패로 갈라 살게 했다. 그랬더니 양쪽은 ‘래틀러즈’ ‘이글즈’란 이름 아래 행동수칙까지 만들며 똘똘 뭉쳤다. 반면 상대편에겐 까닭없는 적개심을 보였다. 평범하던 소년들은 갈수록 서로 미워하고 공격적이 됐다. 끝내 상대 깃발을 태우고 밤에 숙소를 습격한다. 단순한 ‘편가르기’만으로 적대적 양극화가 빚어짐을 보여준 유명한 ‘로버즈 케이브 실험’이다.

이런 본성 탓인지, 요즘 미국에선 이념적 양극화가 심해지는 추세다. 민주·공화로 갈라선 정계는 사사건건 대립, 의료보험 확대 등 굵직한 문제에 속수무책이다. 미국이 자랑하던 초당적 협력은 흘러간 유행가가 됐다. 언론에선 ‘제2의 남북전쟁’이니, ‘50 대 50의 정치’니 하는 시니컬한 비유가 넘친다.

상대편을 무조건 미워하는 게 인간 천성이라면 시대가 변했다고 바뀔 리 없다. 그럼 왜 요즘 들어 양극화가 심해진 걸까. 미국에선 제2차 세계대전을 함께한 원로세대의 퇴조를 원인으로 보는 이들이 적잖다. 이념과 인종을 넘어 전쟁터에서 체득한 진한 전우애가 화합의 밑거름이 돼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뉴미디어의 눈부신 발전을 더 큰 이유로 꼽는 이들이 많다. ‘부수적 인식론’이라는 게 있다. 어떤 행동을 하다 보면 원하든 원치 않든, 여러 정보를 얻게 된다는 이론이다. 한 수퍼에서 빵을 계속 산다 치자. 기웃거리다 보면 라면·배추 값도 눈에 띄어 저절로 물가동향을 알게 된다는 얘기다.

이런 부수적 인식은 균형 잡힌 시각에 도움을 준다. 신문·TV 등 올드 미디어를 볼 때 특히 그랬다. 20여 년 전 16면짜리 신문을 읽다 보면 웬만한 광고까지 눈에 들어온다. 1시간짜리 TV뉴스를 쭉 보면 각종 정보에 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디 그런가. 인터넷에선 클릭만 하면 원하는 뉴스로 직행한다. 흥미없는 건 일절 안 봐도 된다.

더 심각한 건 보수·진보로 나뉜 매체들이 독자 입맛에 맞는 기사만 싣는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보수적인 폭스뉴스가 출현, 진보적 인사를 물어뜯는다. 70, 80년대에도 진보-보수 간 갈등은 있었다. 그러나 그때엔 상대방에 반대할지언정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아는 분위기였다. 신문을 넘기다 보면 성장 우선주의자들도 전경에게 얻어맞는 가녀린 여공들 사진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극렬 노동운동가라도 포니의 성장신화를 대충은 알았다.

그러나 미디어 환경이 바뀌면서 현실세계도 급변했다. 독자들은 정보 편식으로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인식체계를 갖게 됐다. 수입 쇠고기 파동 때 “왜 촛불시위를 벌이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이들이 적잖았다. 촛불시위대는 쇠고기 수입을 찬성하는 이들의 정신건강을 진심으로 의심했을 거다. 편중된 정보의 방에 갇혀 벽 너머를 이해 못하는 단절의 시대를 사는 탓이다.

물론 이런 병폐는 미국에도 있다. 한국과 다르다면 미국에선 다양한 대책들이 논의된다는 점이다. 대선후보들부터 양극화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다. 민주당 버락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도 두 개로 갈린 정계를 화합시키겠다는 게 요체다. 공화당 존 매케인은 퍼플 폴리틱스, 즉 ‘보랏빛 정치’를 들고 나왔다. 공화당은 빨강, 민주당은 파랑이 상징이라 합치면 보라가 된다. 양당을 아우르는 정치를 하겠다는 거다.

선택이 풍요한 다매체 시대는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그 속엔 이념의 편중화란 독이 숨어 있다. ‘선택의 패러독스’다. 그럼에도 첨단 인터넷 발달로 어디보다 이념적 양극화가 심한 한국에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거의 안 보인다. 외국을 베껴먹던 시대는 가고 ‘정보 편식’에 대해 우리 스스로 해결책을 짜낼 때가 왔다. 이 분야에선 단연 한국이 최고 선진국인 까닭이다.

남정호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