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만에 만난 동생 살아 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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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용천을 떠나 월남한 김병서 할아버지가 2000년 8월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53년 만에 만난 동생이 담긴 앨범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전익진 기자]

"53년 만에 동생들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는데…. 무사할지 걱정돼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어."

열차역 참사가 발생한 평북 용천 출신의 김병서(金炳瑞.79)할아버지는 사고 이후 용천에 남아 있는 세명의 친동생들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金할아버지는 2000년 8월 이산가족 상봉 때 평양 고려호텔에서 북한에 있던 막내동생 명수(가명.65)씨를 극적으로 재회했다. '혹시나' 하는 막연한 기대에 상봉을 신청한 것이 성사됐다. 상봉 희망대상을 5명밖에 쓸 수 없어 그는 막내동생과 삼촌들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그러나 삼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두 여동생은 시집가서 주소가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해 아예 상봉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金할아버지는 동생이 얼굴을 못 알아볼까봐 물장구 치던 장소, 좋아하는 음식, 자주 놀던 친구 등 어린 시절 기억들을 빼곡히 종이에 적어 상봉장으로 갔다. 헤어질 당시 여섯살이던 동생은 형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10여분이 지나 형임을 확인한 뒤 부둥켜안고 반세기에 걸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2박3일간의 상봉 행사가 끝난 뒤 두 형제는 기약없이 헤어졌다.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자는 공허한 약속밖에 할 수 없었다. 동생 명수씨는 여동생 두명이 이번에 사고가 난 용천역 주변에 살고 있으며, 오빠(金할아버지)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자신을 잘 따르던 여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金할아버지는 "상봉 신청만 했더라면 여동생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봤을 텐데. 혹시 변이라도 당했으면 어떡하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金할아버지가 기억하는 고향 용천은 논과 밭이 넓게 펼쳐진 '곡식 걱정 없는 좋은 동네'였다. 그는 학교 일과가 끝나면 자신보다 각각 여덟살과 열두살 어린 여동생들과 함께 남동생 명수씨의 손을 잡고 뒷산을 오르곤 했다.

"죽기 전에 누이들 집과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는 게 마지막 희망이지. 내 발로 찾아갈 때까지 제발 살아만 있어 줬으면 좋겠어."

金할아버지는 지난 상봉 때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뒤적이며 동생들에게 썼다 보내지 못한 편지를 어루만지며 동생들의 안전을 위해 밤마다 기도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 의정부에 살고 있는 그는 월남 후 교직생활을 계속 해오다 92년 정년퇴직했다.

임장혁.김은하 기자
사진=전익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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