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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질풍노도처럼 따냈다마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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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에서는 요즘 대학졸업식이 한창이다.전국에서 5천명이 넘는한국계 학생들이 대학문을 나서고 있다.서울대의 지난해 졸업생(4천1백26명)보다 많은 숫자다.
얼마전 웨스트포인트(미 육사)졸업식에서는 기소연양 등 18명의 한국계가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으로부터 졸업장을 받고 미 육군소위가 됐다.
미국 졸업식에서는 으레 명사를 초청해 연설을 듣는 전통이 있다.대학마다 연사유치 경쟁도 치열하다.산전수전을 겪은 노장이나스타를 부르게 마련이다.며칠전 바드대 졸업식에는 호메이니로부터처단명령이 내려진 현상금걸린 사나이가 연설하러 모습을 드러냈다.이슬람교를 건드린 『악마의 시(詩)』라는 문제작으로 7년동안이나 숨어 사는 영국의 소설가 샐먼 루시디였다.대학당국은 졸업식 전날까지 이 「비장의 연설자」를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다.
미국 대학총장은 졸업식 때 한가지 중대결정을 내려야 한다.학생에게 졸업장을 줄 것이냐,말 것이냐가 아니라 졸업식을 실내에서 거행할 것인가,야외에서 치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졸업의식은 초여름 밝은 햇살아래 담쟁이덩굴이 싱그러운 옥외졸업식이라야 제격이다.하지만 날씨변덕이 심한 곳에선 큰 도박이다.얼마전 뉴욕대의 졸업식이 좋은 본보기였다.고집 센 총장이 야외졸업식을 강행하겠다고 선 언했다.일기예보를 듣고 빗발치는 문의에 학교측은 한마디로 대꾸했다.비가 오나 눈이 오나(rain or shine) 정해진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었다.인생의 뱃길에서 비바람을 피할 수 없듯이-.
아니나 다를까.졸업식날 최악의 폭우가 몰아닥쳤다.우산을 펴봤자 강풍에 곤두박질쳤다.히피문화의 발상지로 유명한 워싱턴 스퀘어에는 2만명의 축하객이 몰려 발을 굴렀다.사람들은 의자위에 올라섰다.기온마저 뚝 떨어졌다.스키 파카를 입고도 오들오들 떨며 여기가 화성이냐,지구냐고 엄살떠는 사람도 있었다.주변 캠퍼스의 TV교실을 모두 개방해 생중계하며 대안을 마련했지만 별로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영화『주라기 공원』으로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연설대 앞으로 다가섰다.그가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받는 날이었다.영화 한편의 상상력으로 자동차 3사의 1년 수입보다 많이 벌어들인다는 신화의 주인공이다.그는 비에 젖은 학위를 한손에 쥔채 마이크를 잡았다.『미래를 향해 폭풍우 같이』(take the future by storm)란 단 한마디였다.이보다 짧은 연설도 드물 것이다.보랏빛 가운이 흠씬 젖은 7천여 졸업생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했다.분수대 웅덩이에 몸을 던지는 남녀 졸업생도 있었다.
질풍노도라면 한국사람처럼 몰아붙이는 민족도 없다.10년의 짧은 기간에 올림픽과 월드컵을 따낸 저력이다.대통령으로부터 동네축구 어린이까지 한덩어리가 돼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폭풍같은 열정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6년간 내실의 열매를 차갑게 갈무리할 때다.
필자는 안전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본다.5조원의 특수(特需)도,한.일경쟁도 안전한 월드컵으로 세계인을 맞이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안전은 안팎에서 다져야 한다.무너지고 터지는 일이 없는 튼튼한 월드컵이 돼야 한다.어린이의 2층침대 로부터 한강다리까지 너무도 많은 것이 무너졌음을 교훈삼아야 한다.둘째의 안전은 밖으로부터의 안전이다.27분만에 폭풍처럼 넘어온 미그기를 우리는 보았다.서울은 24시간,부산은 7일이라는 질풍노도와더불어 가야 하는 월드컵이다.올림픽을 시샘해 하늘과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동.서해에 항공모함을 띄워놓고 피난민의 둑이 무너진 속에서 인류의 축제가 치러질지 아무도 모른다.월드컵이 볼모가 되는 정치학은 우리가 피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외 교과제다.
최규장 칼럼니스트.政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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