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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어디서 즐기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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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지도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돌이켜 보면 영화 쪽도 참 많이 변한 것 같다. 처음 작업했던 '돈을 갖고 튀어라'와 가장 최근작인 '귀신이 산다'를 비교해 보더라도 작업 방식에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세월은 영화 작업 방식을 바뀌게 했지만 생활의 변화도 뒤따르게 한 것 같다. 감독 초년병 시절엔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영화의 성공에만 몰두하며 생활했으나, 지금은 몇 가지의 여가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주5일제 근무가 정착되어 가고,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바뀌면서 여가 활용이 많이 변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의 여가 활용이 그저 보고 듣고 하던 소극적인 모습이었다면, 요즘의 여가 활용은 보고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인터넷 강국답게 각종 온라인 동호회의 활성화로 인해 오프 라인으로까지 모임을 이어 주말이면 여기저기서 동호회 모임이 이뤄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사회인 야구다. 필자도 매주 나가지는 못하지만 조이리(Joelee) 사회인 야구 리그에 속한 야구팀에서 야구를 한다. 여느 동호회가 그렇겠지만 여기 역시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회사원.수퍼 주인. 택시기사.학생…. 물론 배우와 영화인들도 있다. 다양한 직업만큼이나 야구를 시작한 동기도 다양하다. 한때 야구선수를 꿈꿨으나 이루지 못했던 사람, 단지 야구가 좋아서 하는 사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온 사람,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하는 사람 등. 이들과 어울려 야구를 하다 보면 정말로 내가 야구선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진짜 야구선수 같은 날렵한 동작은 못할지라도 마음만은 여느 프로선수 못지않은 다짐으로 경기에 임한다. 처음엔 나에게 공이 많이 와주길 바라며(공이 안 오면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좀 심심하다) 시작하지만 한두 번 실수하다 보면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제발 우리 투수가 잘 던져 삼진 아웃을 잡게 되길 바라고, 상대 타자가 치게 되더라도 공이 나에게 제발 안 왔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몇 번의 실수가 더해지면 결국에는 팀을 위해 공이 제일 안 오는 포지션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공격할 땐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홈런을 꿈꾸다 삼진을 먹기 일쑤다. 그래도 어떻게 한 경기 마치고 나서 결과에 상관없이 함께했던 사람들과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생활의 스트레스가 시원하게 사라져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아주 가볍고 상쾌하다.

이 즐거운 발걸음에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수히 많은 야구동호회가 있는데, 이 많은 팀이 야구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제대로 된 공간(야구라는 특성상 위험한 요소가 있기에)이 절대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회인 야구 리그라는 상황 때문에 규격화된 구장에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리그에 참여하지 않는 대부분의 동호회는 제대로 야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먼 곳도 마다않고 다니는 실정이다. 야구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팀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여서 여러 팀이 한곳에 몰려 맘껏 즐기기에는 부족하다. 이것은 야구 동호회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 것이다. 축구나 자전거, 인라인 등…. 많은 시민이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집과 가까운 곳에서 여가생활을 하며 지낼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김상진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