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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의 고통 잊고 즐거움 남아 … 그래서 다시 신의 영역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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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오은선씨는 왜 산을 오르는지 자신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눈길은 또다시 히말라야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사진=김태성 기자]

세상엔 참 별난 사람이 많다. 그중 한 부류가 알피니스트라 불리는 고산 등반 산악인들이다. 그네들에겐 그것이 삶 자체이고 즐거움이겠지만 보통사람들에겐 때론 무모하고 미친 짓(?)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뭣 하려고 비싼 돈 들여가며 목숨을 걸고 그 험한 고생을 사서 하는지 원….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를 뿐이라고? 하기야 고작 어머니 젖무덤 같은 뒷동산에서 뛰어 놀다 평생 한라산이나 백두산도 노래만 부르다 가는 인생들이 그 속을 어찌 알리오.

다 아는 얘기지만 이 세상의 지붕은 히말라야다. 그곳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8848m)를 비롯해 K2(8611m) 칸첸중가(8586m), 로체(8516m), 마칼루(8463m), 초오유(8201m), 다울라기리(8172m), 마나슬루(8156m), 낭가파르밧(8126m), 안나푸르나(8091m), 가셔브롬Ⅰ(8068m),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롬Ⅱ(8035m), 시샤팡마(8027m) 등 8000m 가 넘는 봉우리가 있다. 이른바 ‘히말라야 14좌(座)’다. 이들 14좌는 1986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가 완등한 이래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불과 13명만 마스터했을 정도로 좀체 인간에게 품을 내주지 않는 ‘완고한’ 산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감히 도전장을 내미는 게 알피니스트들의 ‘오기’이고 보면 분명 14좌는 그들에게 꿈의 대상일 터. 2000년 세계 여덟 번째이자 아시아 최초로 14좌를 모두 뗀 엄홍길이 그랬고, 박영석(2001년), 한왕용(2003년) 역시 그랬다.

고산, 그것도 8000m 이상을 오르려면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14좌를 완등한 산악인은 모두 남자다. 하지만 이제 ‘14좌=남성’이란 방정식을 깨려는 여성들의 도전이 거세다. 이같이 ‘당돌한’ 여성 중 한 명이 오은선(42·블랙야크)씨다. 그녀는 97년 가셔브롬Ⅱ를 시작으로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식 이름), 시샤팡마, 초오유, K2, 마칼루, 로체, 브로드피크 등 이미 8개 좌 등정에 성공한 베테랑이다. 그녀의 이 같은 기록은 여성 산악인으로선 한국은 물론 아시아 최고다. 2002년 8월부터 2004년 12월 사이엔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정하는 기록도 세웠다.

“저는 무슨 기록을 위해 산을 타는 건 아니에요. 그저 산이 좋아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된 거고…, 앞으로도 계속 할 거니까 14개를 모두 하면 좋은 거 아니에요?”

한껏 얌전스레 얘기하지만 그녀의 등정 내역을 보면 실로 입이 벌어질 정도다. 가셔브롬Ⅱ야 진작 올랐으니 그렇다 치고, 2004년 에베레스트, 2006년 시샤팡마, 지난해 초오유와 K2, 그리고 올해만 벌써 마칼루와 로체, 브로드피크 등 초고속행진이다. 특히 지난해 5월 8일 초오유에 성공한 뒤 두 달여 만인 7월 20일 K2에 다시 오르는가 하면 올해는 5월 13일 마칼루, 같은 달 26일 로체에 이어 7월 31일 브로드피크 등정에 성공하는 등 갈수록 연속 등정의 무서운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 남자 산악인들도 혀를 내두를 판이다. 여기에다 그녀는 대부분의 봉우리를 무산소로 등정했다. 에베레스트는 산소를 썼지만 단독 등정했고, K2는 8000~8500m에서만 산소를 썼다. 세계 산악인들이 그녀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의 등정 실적을 보곤 대개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그건 큰 오산이다. 그녀는 키 1m54㎝, 체중 48㎏의 아담한 체구다. 손을 잡고 힘을 주어보니 버티는 힘이 약간 뻣뻣하게 느껴질 뿐 작고 보드랍기는 여느 여성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난히 굵은 허벅지하며 하체가 돌멩이 같고, 폐활량은 ‘황영조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그녀다. 알피니스트에게 필요한 ‘최상’의 신체를 타고난 셈이다.

어디 그뿐이랴.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도봉산으로 가다 인수봉에 매달린 사람들을 보고 “어른이 되면 반드시 저걸 해보겠다”는 꿈을 키웠다니 원래 산악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대학(수원대 전산과)에 들어가면서 산악부원이 됐고, 이내 ‘날다람쥐’라 불리며 산에 빠져들었다.

“산에 미쳐 대학시절 내내 변변한 미팅 한 번 못 해봤습니다. 집·학교, 그리고 산이란 삼각구도에 갇혀 살았죠.”

‘말띠 가시내’인 그녀가 해외 원정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역마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93년 대한산악연맹의 여성에베레스트원정대에 참가하면서부터. 졸업 후 서울시교육위원회 소속 공무원이 됐지만 여전히 산에 묻혀 살던 그녀는 원정대 모집에 지원해 1, 2차 테스트를 거쳐 수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선발됐다. 안정된 직장마저 팽개치고 감행한 이 원정에서 고 지현옥(99년 안나푸르나 등정 후 하산하다 사망) 대장과 최오순·김순주 대원 등 3명이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초짜’인 오씨는 7300m에 설치한 캠프3에 그쳤지만 ‘신의 영역’에 들어갔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감을 얻었다. 해서 96년엔 학습지 교사로 모은 돈을 털어 후배 두 명과 함께 몽블랑(4708m)을 가볍게 다녀온 데 이어 내친김에 이듬해 박영석 대장이 이끄는 대학산악연맹원정대의 일원으로 가셔브롬Ⅱ 등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녀로선 최초인 8000m급 봉우리를 무산소로 등정해내자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때마침 14좌 완등을 향해 질주하고 있던 박영석이 불렀다. 자기와 함께 브로드피크에 가자는 것이었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 극구 만류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99년 원정에 참가했다. 하지만 함께 등반에 나섰던 연세대팀 대원의 실종으로 정상 시도를 눈앞에서 접어야 했다. 말로만 듣던 히말라야에서의 죽음을 처음 겪은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해 가을 다시 박영석 등반대의 대원으로 마칼루에 갔지만 이번엔 셰르파의 죽음과 함께 눈사태로 장비를 모두 잃는 바람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 히말라야의 비정함이여!

오은선씨가 올 7월 브로드피크 등반 중 K2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귀국 후 다시는 히말라야를 찾지 않으리라 맘먹고 스파게티 집을 차렸다. 하지만 장사가 잘 안됐다. 그러던 차에 2001년 박영석이 또다시 14좌를 마무리 짓는 K2 등반에 함께 가자고 연락해 왔다.

“연이은 사고를 보며 정말 히말라야가 무섭고 싫었습니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나니 묘하게도 그 삭막한 곳이 그리워지는 거 있죠?”

그런데 이번에도 히말라야는 그녀를 허락하지 않았다. 등정에 성공하고 내려오는 날 대원 한 명이 또 추락사한 것이다. 2차 공격조로서 마지막 캠프(8000m)에 있던 그녀는 일행과 함께 수색에 나서려 했지만 날이 어두워진 데다 갑자기 강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탈출’해야만 했다.

홍일점으로 참가한 세 번의 히말라야 등반이 연거푸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산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7대륙 최고봉이었다. 그해 12월 등산용품 전문업체인 영원무역 소속이 된 그녀는 이듬해 8월 여성으로만 구성된 원정대를 이끌고 유럽의 최고봉 엘브루즈(5642m)에 올랐다. 이어 2003년 5월 한국 여성 최초로 매킨리(6194m)를 단독 등정하고 이듬해 1월 남미의 아콩카구아(6962m) 등정으로 고소 적응 훈련을 한 뒤 마침내 2004년 5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8월 킬리만자로(5895m), 10월 호주 코지어스코(2228m), 12월 남극의 빈슨매시프(4897m)를 등정함으로써 7대륙 최고봉 완등을 마쳤다. 여성으로 세계 13번째(아시아 세 번째)요, 한국인으로선 남녀 통틀어 허영호·박영석에 이어 세 번째 기록이다.

그녀의 이 같은 기록 뒤에는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번 있었다. 처음 K2에 갔다 악천후로 탈출할 때 50m나 추락했고, 에베레스트 등정 후 내려오다 탈진해 쓰러져 저체온증으로 변을 당하기 직전 외국팀 셰르파에 의해 발견돼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또 시샤팡마에서는 얼음덩이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진 채 정상을 밟아야 했다. 그런데도 계속 산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소리를 수백 번 들었지만 저도 모르겠어요. 뇌세포가 많이 죽어서 그런지 고통스러웠던 건 금세 잊어버리고 즐거웠던 일만 기억나요. 그러니 자꾸 가고 싶고, 그래서 또 가는 거죠.”

그녀는 여성이라 용변 처리에 불편한 점은 있지만 남성보다 힘이 달려 고산 등반이 어려울 것이란 주장엔 한사코 머리를 젓는다. 자신이 먹을 식량 등 필요한 짐을 질 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균형감이나 순발력은 낫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그녀의 숱한 성공은 때론 배낭마저 메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짐을 줄여 재빨리 정상을 다녀오는 비법(?)덕분이다.

그녀는 매달 찾아오는 생리도 오히려 컨디션을 가늠하는 데 활용할 정도다. 주기보다 열흘가량 당겨지면 몸 상태가 아주 안 좋다는 신호로 며칠간 푹 쉬어 컨디션을 회복한 뒤 산행에 나서는 식이다.

그녀는 이제 14좌 중 6개 봉만 남겨 놓고 있다. 올가을 다울라기리를 하고 내년 봄 칸첸중가, 여름 낭가파르밧, 가을 안나푸르나를 마친 뒤 2010년 마나슬루로 14좌 완등 레이스에 마침표를 찍을 계획이다. 현재 여성 산악인으로 14좌 완등에 나서고 있는 사람 가운데 그녀를 앞서고 있는 이는 오스트리아의 겔린데 칼텐부르너(11개)와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10개) 두 명뿐. 오씨는 요즘 자신의 컨디션과 그네들의 진행 속도로 보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녀는 이들을 의식해 조급해하거나 무리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어차피 받아주고 안 받아주는 건 오로지 히말라야의 뜻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산에 미쳐 아직도 미혼인 ‘땅꼬마’ 오은선, 그녀의 파이팅을 빌 뿐이다.

이만훈 전문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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