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철 기자의 여의도 갤러리] ‘무위험 고수익’ 상품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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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세계화 열풍이 한창이던 1997년 초. 국내 금융회사나 기업 사이에서는 해외 금융 투자가 유행이었다. 그중에서도 JP모건의 ‘토털 리턴 스왑(TRS)’이란 상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태국 바트화로 돈을 빌려 인도네시아 루피아 표시 채권에 투자하는 상품이었다. JP모건은 바트화를 꿔주면서 금리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상환 때 최고 3%의 수수료를 얹어 주겠다며 국내 투자자를 유혹했다.

돈을 빌린 사람이 거꾸로 수수료를 받는 상품을 만들 수 있었던 건 금리 때문이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루피아 표시 채권의 금리는 연 20.2%였다. 금리가 싼 바트화를 빌려 루피아 표시 채권을 사면 바트화 대출금리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 상품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트화 가치가 폭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바트화는 일본 엔화에 연동돼 있었다. 바트화만 폭락하는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만큼 위험이 없고 수익은 짭짤한 상품이 따로 없어 보였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비일비재한 게 투자의 세계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외환위기가 닥치자 바트화와 루피아화 가치가 폭락했고, 투자자는 천문학적인 손실을 봤다.

올 들어 6월까지 519개 기업에 1조4781억원의 손실을 입힌 ‘키코(KIKO, Knock in-Knock out)’의 악몽은 10년 전 양상과 많이 닮았다. KIKO는 지난해부터 중소 수출기업으로부터 인기를 끈 환 헤지용 통화옵션 상품이다. 구조는 의외로 간단하다. 원-달러 환율의 상·하한선을 정한 뒤 환율이 그 안에서만 움직이면 수익이 나게 설계됐다. 수출기업으로선 환 위험도 덜고 잘만 하면 수수료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으니 금상첨화로 보였다.

그러나 KIKO에도 함정이 있었다. 환율이 계약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더욱이 지난해만 해도 환율이 너무 떨어져 걱정이었기 때문에 상한선은 낮게 잡았다. 10년 전처럼 은행은 “네 자릿수 환율시대는 끝났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달러당 800원이 깨질까 우려했던 환율이 거꾸로 1100원대를 코앞에 두게 됐다.

뒤처리 과정도 10년 전과 닮았다. 당시 피해를 본 기업은 JP모건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 와중에 한남투신과 신세기투신 등 상당수 금융사가 문을 닫았다. 3억5000만 달러를 날린 SK그룹은 손실 처리를 위해 분식회계를 했다가 그룹 자체가 풍비박산 날 뻔했다.

KIKO에 물린 중소기업도 소송에 나설 태세지만 불행히도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상당수 중소기업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지만 이거 하나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무위험 고수익’ 상품은 없다는 사실이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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