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과문화

무엇이 오늘의 나를 만드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나는 요즘 주말 저녁마다 ‘엄마가 뿔났다’를 보는 재미에 빠져든다. 육십이 넘은 배우, 김혜자의 말간 얼굴 표정 하나, 몸짓 하나에 웃고 감탄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가는데, 게다가 이 드라마는 요즘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중이란다. 비슷한 얼굴의 십 대, 이십 대 연예인 일색이던 그간의 TV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솔직히 이 드라마의 히트는 신선하다 못해 통쾌하기까지 하다.

이십 년 전쯤에도 중년 여배우가 주연을 맡은 연극 한 편이 장안의 화제였다. 박정자 주연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말이다. ‘엄마는…’은 중년의 부인들까지 공연장으로 끌어냈을 만큼 모녀의 얘기를 잘 풀어낸 수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연극이 공연되는 두 시간을 오로지 배우 박정자만 쳐다보다 온 것 같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것에 관한 어떤 생각이 벼락같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 연극을 보았을 무렵의 나는 광고쟁이로서의 재능이 있는지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고, 재능 없음이 맞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만둬야 하지 않나 하는 회의가 깊던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배우 박정자는 우리 연극의 중심으로 갈채 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가 누리는 영예가 재능 덕이었는지를 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묻는 순간 답을 알았고 그 생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를 붙잡아 주었다.

그녀가 스물 몇에 배우로 데뷔했을 때 또래의 동기생 몇도 같이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박정자보다 더 재주 많은 이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들로 무너졌고 중도에 포기했다. 재능 부족을 탓하며 그만둔 이도 있었을 거고, 배가 고파 다른 쪽으로 돌아섰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같이 출발한 동기생들이 떠나고 사라지는 동안, 배우 박정자는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므로 최고의 배우로서 그녀가 누리는 영예와 갈채는 그저 재능의 선물이 아니라고 나는 감히 결론 내렸다. 수많은 고비를 넘어 끝내 자기 길을 걸어 낸 단단한 의지와 태도의 총합인 것이며, 수십 년 묵묵히 한 길을 걸은 이에 대한 예우임을 발견한 것이다.

마흔이 지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바로 이런 뜻이리라. 어릴 때는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 어떤 재능을 물려받았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에 결정적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나이 마흔이 넘고 오십이 되어서도 재능이 부족해서, 혹은 부모를 잘못 만나서를 말한다면 그가 제대로 된 어른일 것인가. 지나 놓고 보니 마흔이란 그런 나이였다. 생을 받아 나올 때 이미 정해져 있던 것들과의 결별, 그 후에는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만들어 가야 하는 인생. 말하자면 존재의 독립이랄까를 이뤄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이 마흔쯤에는.

나는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들을 보면 무엇이 그들의 오늘을 만들었는지가 참 궁금하다. 그래서 겉에 드러난 결과 말고 안쪽을 들여다보곤 하는데, 좀 성급한 결론을 말하자면, 살아온 세월이 쌓일수록 태도와 의지, 심성 같은 것들이 재능이나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해지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고 보니 옛사람들은 이미 이런 이치를 꿰뚫고 있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가 말해주듯….

세상에 의미있는 일들은 대개 우직하다 못해 미련한 사람들이 해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뚝심 김경문 야구의 빛나는 승리와 감동을 말이다. 그가 만일 조금만 의지가 약한 사나이였거나, 세평에 밀려 한 번이라도 자신의 뜻을 접었더라면 몇 날 며칠 온 국민을 뜨겁게 감동시켰던 ‘기적’은 없었으리라. 바람이 선선하니 참 좋다. 무엇이 과연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인지, 생각에 빠져들기에도 참 좋은 때다.

최인아 제일기획 제작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