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월드컵축구 韓.日 '공동'결정까지 피말린 취재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정회장 만찬계획이 최소됐대요.』 지난달 31일 오전10시(이하 현지시간) 취리히의 국제축구연맹(FIFA)본부 정문옆 공터.정몽준대한축구협회장의 수행비서 한명이 한국기자들에게 이렇게내뱉고는 급히 안으로 사라졌다.
『뭐야,취소라고.』 한국기자들 사이에선 합창처럼 『야 이거 꼬인 거 아냐.』『결국 내일(6월1일)표대결로 결판을 내자 이거지』등 갖가지 해석들이 와락 쏟아졌다.
대부분 불길한 예감이었다.그러나 더이상 예감이나 교환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정문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한국기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인근 준네베르크호텔 미디어워킹룸으로 후다닥 달려가 전화통부터 붙잡았다.
『취리힌데요.아까 보고한 저녁식사가 취소됐답니다.…예.…그말밖에 못 들었어요.…알았습니다.또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접근한계선은 여전히「공터」까지로 제한돼 있었고 추론만 오리무중을 맴돌았다.여기저기서『젠장,어떻게 되는 거야 이거』가 터져나왔으나 하릴없는 탄식에 불과했다.
정몽준회장과 일본측 유치위대표단이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정보가 이날 소동의 원인이었다.FIFA집행위 개막(오전9시)직후 알려진 이 소식은 당연히 한.일 공동개최로 받아들여졌다.부랴부랴 기사송고까지 마쳤는데 만찬취소라니.거기다 누가 퍼뜨렸는지 만찬취소를 지시하는 정회장의 표정이 어두웠다는 스케치까지 곁들여져 한국기자들은 하나같이 죽을상이었다.반면 일본기자들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회의장쪽으로 도시락꾸러미들이 배달되고 곧이어 정회장이 한국기자들과 점심을 겸해 갖기로 한 간담회마저 취소됐다는 소식이 이어졌다.『까짓거 화끈하게 이겨버리면 될 거 아냐』하면서도 불길한 예감은 좀처럼 수그러들줄 몰랐다.몇초 간격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 볼 때마다,일본기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첫날 저녁 시내 주네허스호텔에 여장을 풀기도 전에 들은 소식은 주앙 아벨란제 FIFA회장이 이미 일본쪽으로 표다지기를 끝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남미의 축구관계자 50여명을 대동한 채 예정(5월29일)보다 이틀앞서 취리히에 와 표몰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구세주로 여겼던 레나르트 요한손 유럽축구연맹(UEFA)회장의 행동은 너무나 한가했다.29일에야 취리히에도착한 그가 안달복달하는 한국기자들에게 들려준 말은 고작 『1주일전이나 지금이나 내 생각(공동개최안 상정)은 같 다』에 불과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거의 유일한 위안은 운명의 날(31일)아침에 주워들은 몇마디뿐-.이홍구 한국유치위 명예위원장과 미야자와 전 일본총리가 간밤에 만나 공동개최를 합의했다더라,아벨란제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장(IOC) 을 만나 어려움을 호소하고「훈수」를 부탁했다더라는 것이었으나 확인할 길이 묘연했다.그런데 막상 집행위가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만찬취소 해프닝까지 겹쳤으니….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다시 본부앞 공터로 나왔다.이젠 오후회의다.어떻든 여기서 결말난다.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한국기자들과여전히 희희낙락거리는 일본기자들의 모습이 엇갈렸다.
『헤이 코레아,신!』 쓰레기통에 담배를 비벼끄다말고 고개를 돌렸다.순간,함지박만한 미소와 번쩍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이 산더미처럼 크게 눈에 들어왔다.취리히에 와서 친해진 나이지리아의 기자 겸 축구협회 간부였다.『코 호스트!(Co-Host,공동개최)』.뭐 냐고 묻기도 전에 내뱉은 그의 일성이었다.
그의 정보는 정확했다.얼마안돼 2시10분쯤 회의장에서 나오는집행위원들의 모습이 보였다.약간 찌푸린 듯한 아벨란제회장의 표정,다른 사람 눈치때문인지 알듯 모를듯 묘한 미소를 흘리고 차에 오르는 정회장.『일본에 지진 않았구나』 하는 탄성과 함께 사태가 금세 파악됐고 곧이어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오던 잭 워너집행위원(트리니다드토바고)이 이를 확인시켜줬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토록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한.일양국의 3년여에 걸친「월드컵전쟁」이 종식됐음을 알리는 최초의 공식보고였다.
취리히=신성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