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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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홍도가 현감(縣監)으로 있던 충청도 연풍과 경상도 안동 근처의 탈춤 고장 하회(河回)를 보고 싶다는 이자벨에게 서여사도동행하겠다고 했다.
『연풍은 문경 새재로 넘어가는 후미진 산골 마을이지요.문경 새재는 조령(鳥嶺)이라 불리는 험준한 산인데,이 산을 다룬 책을 내느라 취재가는 길에 지나가 본 적이 있었어요.가톨릭교의 성지(聖地)이기도 하지요.한번 들러보고 싶었는데 잘 됐군요.』스티븐슨교수가 반색하며 자기도 따라나서겠다며 콕 로빈에게도 함께 가기를 청했다.
『아리영씨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어.』 콕 로빈이 농담처럼 응했으나 입가에 띤 웃음엔 힘이 없었다.
서여사가 잠시 의외롭다는 듯한 눈빛으로 콕 로빈과 아리영을 건너다 보고나서 말했다.
『참,할아버님께서 소장하셨던 가야토기 관계 책이 이제 인쇄 단계로 들어갔어요.』 서여사는 작은아들 김사장을 인터폰으로 불러 시험 인쇄한 견본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김사장은 가(假)인쇄된 프린트물을 한아름 가지고 나타나 아리영을 반겼다.
『그러잖아도 연락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일본엔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 빠릿빠릿하나 정중한 말투가 흡사 우변호사 같았다.
목소리까지 닮았다.아버지는 달라도 역시 한 핏줄임을 실감할 수있었다.다시 우변호사 생각이 나 가슴이 메었다.
보름 후에 책이 나온다는 김사장의 보고를 들은 다음 서여사가일렀다. 『그럼,김사장은 이 분들한테 책에 수록된 가야토기 설명을 해 드리고 있어.나는 아리영씨와 좀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콕 로빈씨는 가야토기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니 자세하게 말씀 올려라.』 서여사는 아리영에게 손짓하며 나가자고했다. 대청마루의 댓돌 위엔 가죽신 몇 켤레가 놓여 있었다.마당 나들이를 위해 특별히 맞춘 발막신이라 했다.그 전통 신발은생각보다 부드러워 고무신처럼 신기가 좋았다.우리 민예품의 생활화에 애정을 기울이는 서여사의 아이디어다웠다.
『이리 와 앉아요.』 어루화초담의 붓꽃 화단 옆에 작은 연못이 있고,무당의 방울같은 꽃송이를 치켜든 오동나무가 은은한 향기로 연못을 덮고 있었다.
서여사가 연못가의 평상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정길례여사는 입원하신 게 아니고 여행을 떠나셨다는데,어디로가셨는지 가족분들도 전혀 모르신다는 거예요.』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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