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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50년 전 독도 지킴이들, 길이 기억됐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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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고(故) 홍순칠 대장의 부인인 박영희(右)씨가 외아들 인근씨와 함께 洪대장의 사진첩과 훈장을 놓고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아래 사진은 1954년 대원들과 함께 망원경으로 독도 근해를 감시하는 洪대장) [임현동 기자]

"지난 20일은 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된 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사는 데 여유가 없어 아무런 기념행사도 마련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것이 가슴 아픕니다."

1953년부터 4년간 독도를 지켰던 고(故)홍순칠(洪淳七.86년 작고) 독도의용수비대장의 부인 박영희(朴永姬.72)여사에게 4월 20일은 매우 특별한 날이다. 洪대장 등 33명의 대원이 경기관총과 M1소총으로 무장한 채 5t짜리 오징어잡이 어선을 타고 독도로 들어간 날이 53년 이날이고, 정식으로 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된 날이 54년 이날이기 때문이다.

朴씨는 52년 가을 안동사범학교 은사(恩師)의 자취방을 찾았다가 역시 스승을 뵈러 온 洪대장과 만났다.

"오른쪽 다리를 절긴 했지만 너무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한눈에 반했죠."

洪대장은 육군 기갑부대원으로 한국전쟁을 맞았고, 원산 전투에서 다리에 화상과 관통상을 입어 52년 7월 제대했다. 朴씨는 그해 12월 울릉도로 시집을 갔다.

"시조부(홍재현 옹) 때부터 울릉도에서 살았대요. 시조부께선 향나무를 가져가 독도에 옮겨 심을 정도로 독도에 애정이 많았어요. 남편은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전쟁이 끝난 뒤 독도로 미역을 따러 간 울릉도 어민들이 일본 경비정에 쫓겨 도망온 얘기를 듣고는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울릉도 젊은이들을 규합해 수비대를 조직한 洪대장은 집과 땅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한 뒤 부산으로 가 권총.수류탄.소총 등을 구입했다. 당시 부산의 지하시장에서는 돈만 주면 웬만한 무기는 구입할 수 있었다.

수비대는 독도에 상주하며 접근하는 일본 어선을 내몰고 일본 경비정과 총격전을 벌였다. 가져간 식량이 떨어져 해조류를 뜯어먹고 빗물을 마실 때도 많았다. 56년 12월 말 독도 방위업무를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대원들이 집에서 잠을 잔 날은 1년에 열흘이 채 못됐다고 朴씨는 회고했다.

이후에도 '독도는 우리 땅'을 외쳤던 洪대장은 80년대 초 기관원에게 끌려가 뭇매를 맞은 뒤 '다시는 독도 문제로 떠들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한.일 외교 마찰을 우려한 신군부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洪대장 가족(부부와 1남3녀)은 85년 울릉도를 떠나 서울로 갔다. 전상 후유증에 시달렸던 洪대장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洪대장은 결국 척수암에 의한 전신마비로 86년 2월 눈을 감았고, 경기도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보훈급수(6급)가 낮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없었다.

"남편은 평생토록 대원과 그 가족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말 못할 고생을 시키고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게 해주지 못했으니까요. 연금도 없고, 2세들의 직장 알선 혜택도 없는 대원 가족은 대부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朴씨에겐 소망이 하나 있다. 국민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독도에 이들의 공로비를 세웠으면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소망만 이뤄진다면 훗날 저 세상에서 남편 볼 면목이 있을 것"이라며 洪대장의 사진을 어루만졌다.

김동섭 기자<donkim@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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