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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국OB축구회장 정남식 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일본이 먼(무슨) 낯짝으루 월드컵을 우리랑 같이 하겄다는 수작인지 지끔도 모르겄어.』 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 소식이 전해진 31일 밤 한국OB축구회장 정남식(79)옹은몽땅 빼앗기지 않은 안도보다는 단독개최를 놓친 아쉬움부터 털어놓았다. 48년 런던올림픽,52년 마닐라아시안게임,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신생 코리아의 최고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던 정옹은 세 대회에 두루 출전한 선수중 유일한 생존자.
정옹이 『양심이 있으먼 애초에 신청도 안했어야 되는 거여』라며 일본의 유치신청 자체에 대해 토를 단 이유를 설명했다.정옹은 일본이 축구는 물론 스포츠를 통째로 모독한 「전과」부터 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네번이나 (본선에)나갔지만 일본은 한번도 못나갔잖여.그래 그것은 놔둬도 말이여.우리랑 붙었다하면 맨날 진다고 속이 상하니까 축구고 뭐고 못하게 심술(일본 식민치하였던 1942년의 구기폐지령)을 부려놓구선 인제 월드컵을 개 최하겄다고?』 전북만경에서 소학교에 다닐 무렵(1917년2월생) 짚신을 말고 새끼로 둘둘 묶은 축구공을 차면서 상급 학생들을 골려주는재미가 쏠쏠해 축구선수로변신한 「청년 정남식」은 구기폐지령 때문에 보성전문(현 고려대) 2학년때부터 해방되던 45년까지 축구를 그만둬야 했다.
정옹이 태극마크를 처음 단 것은 이미 서른줄에 오른 47년.
상하이 교민들의 주선으로 한국대표팀은 첫 해외원정길에 나서 상하이의 철로족구대.청백족구대.동아족구대등과 친선경기를 가져 3승1패의 전적을 올렸다.
이듬해 그는 런던올림픽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5-2승리를 견인하고 52년아시안게임에서도 발군의 활약으로준우승을 차지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그담,(스위스)월드컵출전이 가관이었지.한국하고 일본하고 왔다갔다(홈 앤드 어웨이)해서 많이 이긴 팀이 나가게돼 있었어.
근디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일본사람은 발도 못들여 놓게하라고고집을 부려서 우리가 일본에 가서 두번을 붙었어 .』 그때 정옹은 5-1로 이긴 1차전에서 해트트릭,2-2로 비긴 2차전에서 두골 모두 잡아내며 월드컵티켓을 한국에 안겼다.한국의 첫 월드컵출전은 차라리 코미디였다.
주전선수와 후보선수로 나눠 부산에서 페리호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가 비행기로 암스테르담을 거친 한국팀이 취리히에 도착하는데만 사흘이 걸렸고 그나마 당시 무적함대 헝가리와의 경기를 불과하루반나절 앞둔 시점.
9-0패배는 오히려 감지덕지였다.『기왕 날샜으니 온 사람 다뛰어보자』고 2진을 내세운 터키와의 경기에서도 7-0으로 대패했다. 『그것은 약과여.월드컵이란 대회가 있는지나 알았남.오직했으먼 (출전국에 대한)배당금이 있는지도 모르고 떨어지니까(예선탈락) 그냥 와버렸다가 나중에 (우편으로)부쳐줘서 받았다니깐.』 그래도 왕년의 무용담은 정옹의 기분을 어느정도 바꿔놓았다. 『뭐 할 수 있나.어차피 같이 하기로 했으니까 잘 해야지.
속은 상하지만 옛날 감정 자꾸 또작여(뒤적여)봐야 남는 게 없어.정몽준회장이랑 그동안 수고한 사람들한테 수고했다고 해주고 말이여.』 여전히 현역시절의 몸매(172㎝.62㎏)를 유지하고있는 정옹은 『그때(2002년)까지 살아서 (월드컵경기를)꼭 봐야제』라며 말을 맺었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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