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울 성수동의 전기설비공장에 들어갔다. 경기도 오산을 거쳐 84년엔 고향인 충북 청주에 내려가 전기기술자노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번도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노동운동가가 아닌 진정한 노동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그런 그가 86년 변신을 했다. 아버지에게서 빌린 1800만원으로 직원이 3명인 전기공사업체를 차렸다. "운동을 하더라도 경제적 토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변절자' 소리가 두려워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하고 싶었다"는 게 그가 설명한 변신의 이유다.
그의 회사는 10여년 만에 매출액 수십억원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는 번 돈의 일부를 시민사회운동에 썼다. 지방자치단체 감시운동과 우리밀살리기 등 환경운동에 열중한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그의 생각은 서서히 변해갔다. "공정한 분배만큼 기업의 부가가치 창출과 고용유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정치개혁이란 측면에선 진보적이지만 경제적 관점에서는 중도 보수"라고 자신을 규정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이재정 전 의원의 권유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앞으로 소상공인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운동권 출신 중 가장 시장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라는 말도 했다. 국회의 건교위 또는 산자위를 희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기업의 경제활동을 제한하거나 위축시키는 법안에 대해서는 당론과 관계없이 반대하겠다"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