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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호남의 전국화-호남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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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영남 태생이지만 아내는 호남 출신이다.27년째 살면서 영.호남갈등으로 말다툼 한번 한 적 없다.청년시절부터 지금껏 가깝게 지내는 친구중에도 호남 출신이 많다.어쩌다 만나면 그쪽에서 먼저 『문디! 잘 있었나』로 수인사를 한다.
여기에는 네가 TK지만 나는 너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없는 신뢰가 깔려 있다.부부와 친구간에는 결코 문제가 될 수 없는 영.호남 대립이 어째서 분단의 나라를 동서로 또 한번 갈라놓으면서 정치적.지역적 적과 동지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는가.
난해한 문제일수록 단순화시켜야 한다.영.호남 대립으로 압축되는 망국적 지역감정이란 문화적 대립이 아닌 군사정권과 TK의 장기집권,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광주항쟁이라는 정치적 결과의 산물로 단순화시켜야 한다.이를 입증하는게 최근 발간된 『호남사회의 이해』라는 연구서다.역사학.인류학.사회학.정치학 전공자들로 구성된 연구자들은 역사적.지정학적.문화적 차이가 결코 영.호남 대립으로 연결될 이유가 없다는 여러 반증을 제시하고 있다.지역문화의 활성화란 바람직스런 희망 사항이지 지역대립과 분열로 이어지는 지역 적대감이 될 수 없다는게 연구자들의 일치된 주장이다.
이 책에서 고려대 최장집(崔章集)교수의 영.호남 갈등 요인 분석도 군부독재 결과가 지역대립을 몰고온 최대 중요 요인으로 분석한다.첫째,朴정권아래서 호남이 정치적.경제적으로 배제됐고 둘째,이에 대한 저항이 김대중(金大中)씨를 중심으 로 정치적으로 결집돼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강력한 도전세력을 형성했고 셋째,이 정치적 저항이 광주항쟁과 대량학살로 전개되면서 30년 군부 권위주의는 TK세력이 호남을 배제하는 강고한 피라미드를 형성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민정부가 들어서 연이어 신군부세력을 재판에 올려놓고 지난 군부독재와 광주항쟁 진상을 샅샅이 공개하고 있는데 왜호남은 아직도 열린 호남이 아닌 닫힌 호남으로 남아 있는가.영.호남 대립의 핵심적 요인이라 할 5.18의 광 주는 왜 그냥그대로 남아 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광주밖 사람들은 광주의 고통을 전국적 규모의민주화 진통이라 생각하지 않으려는데 있다고 본다.군사독재의 전체적 흐름속에서 발생한 민주화 투쟁이라고 보지 않고 한 지방의특수사정으로 지역화시키려는 무의식적 책임회피가 작용한 탓이다.
TV드라마『모래시계』의 성공은 광주의 고통을 전국화하는데 일조했지만 그것도 일시적 감동으로 끝나버렸다.
또 다른 측면은 호남인들 스스로 광주 문제를 광주만의 사건으로 끌어안으려는데 있다.시인 최영미가 광주 영화 『꽃잎』을 보고난 뒤 쓴 「광주는 언제 신파를 극복할 것인가」라는 평이 인상적이다.신파의 본질은 자기연민이다.『꽃잎』은 자 기연민의 감상적 뿌연 안개낀 필터를 통해 본 신파조 영화라는 평이다.싸구려 위로보다는 냉정한 무관심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광주를 자기연민의 한풀이로 끌어안으려 하기 때문에 광주는 한국화가되질 않고 광주만으로 남는 것은 아닌 가.지역문제의 지역화,광주문제의 광주화가 지역 대립을 격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일 수 있다. 여기에 또 하나 광주를 광주로 국한시키는 결정적 요인이있다.대통령이 되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안고 있는 김대중총재의 집요한「지역간 정권교체」의지다.권력의 지역적 이동이 있어야모든 지역이 혜택받을 수 있다는 지역등권(等權)주의 에서 영남대(對) 비영남 연합세력으로 정권교체하자는 집권논리로 발전하고있다.92년 대선에서 호남의 정치적 전국화가 이뤄졌다면 군사정권-영.호남대결 구도가 깨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그러나 결과는 호남의 호남화로 끝났다.군사정 권 타도라는 명분이 사라진 마당에 호남의 호남화를 전제로 한 지역연대는 노골적 지역 정당 연대로밖에 비쳐지질 않는다.
한 정치인의 간절한 소망이 호남과 광주의 전국화를 방해하고 영.호남 갈등을 증폭시킨다면 그 책임을 어쩔 것인가.광주항쟁을전국적 민주화투쟁 기념일로 정하는 일처럼 호남의 전국화에 기여하는 노력이 호남정치인의 기본 자세여야 한다.개 인의 소망을 위해 또 한번 호남의 호남화를 외친다면 호남의 개인화밖에 되질않는다.지역정치의 전국화가 권력이동의 기본이다.대선 삼수(三修)에서 번번이 호남의 호남화,광주의 광주화로 실패했던 정치가가또 다시 지역의 전국화와 역행하는 지역간 정권교체 전략에서 실패할 때 호남인의 좌절은 더욱 깊어지고 영.호남 갈등은 치유될수 없는 망국의 한(恨)으로 남을까 걱정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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