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과 추억] “책과 하는 인생처럼 좋은 게 어딨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출판을 천직으로 삼게 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운명이고 축복이었다. 숱한 삶의 모습들 가운데 책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출판인 정진숙』에서)

22일 세상을 떠난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은 60여 년간 외길을 걸어온 한국 출판계의 1세대다. 191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휘문고보를 거쳐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다가 35년 중퇴했다. 그 뒤 동일은행(조흥은행 전신)에 다니던 중 해방이 되자 사표를 던지고 조풍연(수필가)·윤석중(아동문학가)·민병도(전 한국은행 총재) 씨 등과 함께 45년 12월1일 을유문화사를 창립했다. 집안 어른인 위당 정인보 선생이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적인 사업이 출판”이라고 충고한 데 따른 것이었다. 출판사 이름은 해방되던 해의 간지를 따 ‘을유(乙酉)’로 정했다.

첫 책은 46년 출간된 26쪽짜리 한글 연습책 『가정 글씨 체첩』이었다. 정지용 시인의 『지용시선』,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청록집』 등 훗날 한국현대문학사의 대표작들로 평가받는 시집들도 그 해 나왔다.

해방 직후 출판 환경이 극도로 열악할 때였다. 종이를 구하지 못해 책을 만들어내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출판물 유통 구조가 취약해 판매대금을 수금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 때문에 책값을 정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말과 우리글을 소생시키고 부흥시켜 우리 고유의 민족문화를 꽃피우자”는 창립 취지에 따라 부지런히 책을 만들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50년 10월에도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펴냈으며, 53년 7월 종전 때까지 10권의 책을 더 내놨다.

그동안 을유문화사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은 7000여 권에 이른다. 본격적인 통사를 지향한 『한국사』, 문고본 시대를 연 『을유문고』, 동서양의 명작을 한글로 완역한 『세계문학전집』, 대형 기획물의 전범을 보여준 『한국문화총서』『세계사상교양전집』 등 우리나라 출판계의 역사를 새로 쓴 책들도 상당수다. 특히 47년부터 10년에 걸쳐 완성된 『조선말 큰사전』은 일제에 조선어학회원들이 압수당한 원고를 45년 9월 서울역 한국통운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찾아내 만든 책이다.

고인은 병석에 눕기 전인 지난해 7월까지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옥으로 매일 오전 9시 출근하면서 출판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출판계에서의 활동도 왕성했다. 63∼64년, 66∼73년, 79년 등 세 차례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을 맡았다. 사단법인 한국출판금고 이사장(72년), 한국박물관회 회장(87년)도 지냈다. 출판문화발전에 대한 공헌으로 대통령 표창장(68년), 국민훈장 동백장(70년), 금관문화훈장(97년), 유일한 상(2007년) 등을 수상했다. 을유문화사 창립 60주년을 맞은 2005년에는 국내 300여 단행본 출판사 대표들의 모임인 한국출판인회의로부터 ‘아름다운 출판인’으로 선정됐다. ‘많이 팔리는 책보다 좋은 책을 펴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대한 후배 출판인들의 헌사였다.

이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