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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공영방송의 자업자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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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제대로 된 공영방송의 전형으로 흔히들 영국의 BBC와 일본의 NHK를 꼽는다. 이들이 오늘의 명성을 얻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생각한다. BBC의 경우 최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의 갈등에서 보듯 최고 권력자와 전면전도 불사한다. 시원찮은 나라의 관영방송들처럼 권력의 애완견이나 주구(走狗)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권력의 감시견(watchdog)으로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보다는 좀 덜 알려졌지만 독일 공영 제1방송인 ARD도 정확한 보도와 불편부당한 논평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누가 정권을 잡든 공영방송으로서의 본분을 다할 뿐이다. 특히 ARD의 선거결과 예측 보도는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과학적인 출구조사로 오차가 1%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독일에선 총선 날 오후 6시 시보와 함께 누가 집권했는지를 거의 알게 된다. 오후 8시에는 총리 당선자가 방송에 나와 승리 소감을 밝힌다. 공식 집계는 다음날 나오지만 사실상 이로써 선거방송이 끝난다.

이처럼 정확한 출구조사를 자랑하는 ARD도 2002년 총선 때는 곤욕을 치렀다. 개표 한 시간쯤 지났을 때까지 ARD는 야당인 기민-기사당이 여당인 사민당에 2% 포인트 정도 앞선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야당 총리후보인 에드문트 슈토이버 바이에른 주지사는 방송에 나와 승리를 선언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엎치락 뒤치락을 계속하다 결국 자정이 한참 지나서야 사민당의 승리가 확정됐다.

그러나 당시 ARD의 오보는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사민당과 기민-기사당의 득표율은 38.5%로 소수점 한자리까지 같았다. 인구 8000만명이 넘는 나라에서 불과 6000여표 차이로 승패가 갈린 치열한 접전이었으니 정확한 결과를 점치기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시 어느 누구도 ARD의 오보를 문제삼지 않았다.

자, 이젠 우리 방송 얘기다. 우리 방송들의 출구조사는 이번에도 헛다리를 짚었다. 물론 16대 총선 때처럼 제1당과 제2당을 뒤바꾸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과 인원을 투입해 정확한 결과를 낼 것이라던 장담은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여러 가지 해명과 분석이 나왔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응답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장 설득력있게 들린다. 심지어 방송에 대한 항의 표시로 한나라당을 찍은 사람이 열린우리당을 찍었다고 답변한 경우도 많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얘기가 맞는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왜 솔직한 답변을 꺼렸을까. 대명천지에 뭐가 그리 켕겼을까. 마침 KBS 노조의 한 간부가 이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는 최근 한 집회에서 "쪽팔려서 한나라당 찍었다는 얘기를 못한 것" "한나라당 지지자가 대낮에 활보하는 세상이 더 이상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왜 쪽팔려?"라고 묻는 건 현명치 않다. 지난 총선기간, 특히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공영방송들의 보도태도를 보면 답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방송을 죽 지켜본 사람이라면 '또라이'가 아니고서는 한나라당 후보를 찍었다고 감히 말할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래서 "여론몰이 정도가 아니라 올인"이었다는 비판도 들린다.

그러니 우리 방송들은 출구조사가 틀렸던 이유를 애꿎은 국민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 바로 자신들의 보도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공영방송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18대 총선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이 신뢰하지 않는 공영방송은 더 이상 공영방송이 아니다.

유재식 문화 스포츠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