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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웰빙] '밥상 효도' 백합조개 초무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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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조개 가을낙지'란 말 아시죠. 그만큼 봄철의 조개가 맛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어요. 아버지와 백합조개랍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바다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경기도의 작은 산골마을이었습니다. 푸성귀를 뺀 먹거리는 닷새 마다 서는 장날 읍내에 가야만 구할 수 있었지요. 장보기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가 훨씬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었기에 할아버지.할머니는 물론 당신이 좋아하시는 먹거리도 손수 장을 봐다 손질까지 해놓으시고는 음식 맛이 제대로 나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지청구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아버지가 이맘때 자주 사오시던 것이 백합조개였어요. 장을 봐서 합승(지금의 버스)을 타고 30분쯤 덜컹대는 길을 달리다 내려 2㎞나 걸어오다 보면 신선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은 뻔합니다. 백합조개를 사오셔서는 껍데기에 약간 푸른빛이 도는 것, 두껍고 둥근 테가 있는 것, 5년 정도 된 것이 좋다고 사오실 때마다 녹음기처럼 말씀하셨어요. 어머니는 늘 듣던 얘기라 듣는 둥 마는 둥 하셨고요. 하도 여러 번 들어 어릴 적 들은 얘기가 아직도 생각나니 말입니다.

백합조개의 살을 발라서 참기름에 쌀과 함께 달달 볶아서 죽을 끓이거나 껍데기째 삶아서 살을 발라내 초고추장에 무치면 입맛을 돋우는 데는 그만이었어요. 겨우내 애지중지 신문지에 싸서 땅속에 묻은 항아리에 숨겨 두었던 배가 등장합니다. 설날 나박김치를 담글 때 넣고 마지막 등장하는 비상용 배였던 겁니다. 배를 굵게 채썰고 막 돋아난 미나리를 뜯어다가 초고추장에 무쳐서 내는 건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미나리를 뜯어다 넣고 초무침을 하시는 데는 나름의 과학적인 이유가 있으셨고요. 혹여 조개 먹고 탈날까 해독작용이 있는 미나리와 함께 무치셨던 것이지요.

이때 어머니는 항아리에서 겨우내 소금에 절여두었던 짠무를 꺼냅니다. 얇게 채썰어 찬물에 여러 번 헹궈 짠 맛을 빼곤 그릇에 담아 찬물과 파 송송 썬 것, 고춧가루, 식초를 넣어 죽과 함께 내셨어요.

할머니는 늘 진지 잡수실 때 밥그릇에 밥을 한 숟가락 정도 남기셨어요. 한 숟가락 적게 담아드려도 또 한 숟가락을 남기셨는데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백합죽을 쑤는 날이면 그동안 쭉 이어졌던 할머니의 이상한 습관을 볼 수 없었어요. 물론 할아버지도 백합죽 한 그릇을 남김없이 드셨지요. 특히 건치인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만드신 짠무반찬을 아작아작 씹어 아주 맛나게 드셨어요. 봄이 되면 생각나는 그리운 맛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어른들에게 노근한 입맛을 풀어줄 음식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요. 요즘은 밥상이 아이들 중심인 것 같더라고요. 저 어릴 때는 먹을 게 있어도 어른이 먼저 드시기 전에는 먹을 엄두도 못 냈었거든요. 먼 고향에 계시다면 음식 만들어 들고 한번 찾아뵈어도 좋고요. 무슨 때 찾아뵙는 것보다 아무 때도 아닌 때 찾아뵙는 게 더 감동일 테니까요. 정도 새록새록 쌓이고요.

노영희 푸드스타일리스트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백합조개 초무침 만들기

▶재료(4인 1접시분)=백합조개 껍데기째 500g(삶아서 살 바른 것 100g), 대파 잎 2줄기, 청주 2큰술, 미나리 50g, 쪽파 20g, 배 100g, 빨간 고추 1개, 청양고추 2개, 마늘 2쪽, 초고추장(고추장 3큰술, 식초 2큰술, 설탕 1큰술), 참기름 1/2큰술

▶백합조개 준비하기=백합조개는 간간한 소금물에 담가 어두운 곳에 30분 정도 두어 해감을 시킨다. 백합을 박박 씻어서 냄비에 담고 물 반컵과 청주, 대파 잎을 넣고 뚜껑을 덮어서 끓인다. 조개가 입을 벌리면 한 김 식혀서 살을 발라낸다.

▶채소 준비하기=미나리와 쪽파는 잘 다듬어 씻고 물기를 뺀 뒤 3cm 길이로 썬다. 배는 껍질을 벗기고 3cm 길이로 굵게 채썬다. 고추는 반으로 갈라 씨를 긁어내고 3cm 길이로 채썰고 마늘은 얇게 썬다.

▶무치기=볼에 초고추장 재료를 넣고 섞는다. 여기에 조개와 미나리, 쪽파, 배, 고추, 마늘을 넣고 살살 무친 다음 마지막에 참기름을 넣고 살짝 버무린다.

▶맛있게 담기=조개와 야채 무친 것을 그릇에 담고 위에 배 채를 남겼다가 얹거나 미나리 잎을 얹으면 한층 상큼해 입맛을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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