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마다 사연이 알알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5호 07면

일러스트 강일구

여덟 살 때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의 체조경기를 보고 사람 몸이 어찌 저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거의 홀려버렸다. 그때부터 30년 넘도록 올림픽 매니어로 살았다. 4의 배수로 끝나는 새해가 밝아오면 괜히 배가 부른 듯했고, 대회 한 달 전부터는 설렘에 달력만 보고, 기간 중에는 생업을 거의 포기하는 ‘단기 폐인’ 모드로 돌입한다. 이 정도면 올림픽 시청의 ‘달인’이라 불러달라고 할 만한가.

이윤정의 TV 뒤집기

‘올림픽 시청의 달인’을 그토록 붙들어 매는 것은 진정한 스포츠 달인들의 위대한 몸짓이다. 올림픽은 세계의 최고수들이 만나 최강을 가리는 자리다. 그 격렬한 경쟁이 뿜어내는 에너지 속에는 알알이 사연이 가득 차 있다.

여관방에 앉아 죽을 때까지 마시려고 소주를 들이켰다는 유도 최민호가 통쾌한 ‘딱지치기’ 한판으로 금메달을 딴 뒤 흘리던 그 눈물,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아시아인의 1위 골인 장면을 연출해낸 여린 박태환의 역사 창조, 그리고 안타까운 바벨을 놓지 못하고 바닥에 함께 굴러버렸던 역도 이배영의 통한의 눈물. 그건 모두 개그맨 김병만의 말처럼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자기 수련의 시간들을 겪어낸 달인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동이다.

그 고수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이번 올림픽을 다루는 TV의 가장 큰 변화다. 출전 선수에서 해설자 소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사연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된다. ‘태극전사’들에게 “이기자 이겨야 한다, 빛내자 배달의 영예”를 강조하던 70~80년대와 “은메달도 금메달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인정하기 시작한 90년대를 지나 이제는 승부의 세계에 참여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추는 21세기인 것이다.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 말하지만 올림픽에서 중요한 것은 그 드라마의 흥미진진함보다도 모두가 그 드라마의 주연이라는 점이다. 올림픽에서는 수백억원의 연봉을 받는 스타들이 모이는 축구 같은 종목이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카약·조정 같은 종목 모두 공평하게 금메달 한 개씩이다. 뉴욕 타임스의 표현처럼 ‘메달의 민주주의’가 올림픽의 핵심이다. 남이 보든 말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사소한 1초를 앞당기기 위해 애를 쓰는 그들의 땀은 모두 숭고하고 축하받아 마땅하다.

우리의 TV 중계에서 아쉬운 점은 지나치게 ‘우리 경기’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구석구석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종목에서 얼마나 많은 스토리가 생겨나고 있는데. 핸드볼이나 하키처럼 비인기 종목에 대해 올림픽 때만 반짝하는 관심을 질타하지만, 뒤집어 생각하자면 올림픽이 있어 평소에는 드러낼 수 없었던 자신의 실력과 기량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점점 쿨해져 가는 올림픽 TV 방송의 시선들이 무엇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올림픽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이다. 사소한 1m와 사소한 1초를 놓고 그토록 힘을 쓰는 스포츠는, 무엇보다도 놀이이며 올림픽은 축제라는 점이다. 죽도록 애를 써서 금메달을 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만 역도 이배영 선수의 말처럼 “올림픽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축복이며 영광이다. 뛰는 선수에게나 시청하는 사람에게나 선수들의 작은 몸짓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즐거운 축제’로서의 올림픽을 기억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TV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filmpool@gmai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