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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과학언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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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불확정성 원리」의 독일 원자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뮌헨에서 고교시절 라틴어와 그리스.프랑스어와 씨름했다.코펜하겐의 닐스 보어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다시 영어.덴마크어를 공부했다.점심시간 어학실습실에서 영어를 익히고,하숙집에선 여주인을 따라 덴마크신문을 소리내어 읽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전 2백여년 동안 과학적 연구는 대부분 독일어로 행해졌고,프랑스어.영어가 먼발치로 그 다음이었다.1920년대 양자역학 연구에는 독일어가 필수였다.닐스 보어연구소에서 모든 세미나는 독일어로 진행됐다.영어세미나는 가물 에 콩나듯 했고 프랑스어는 소용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언어의 「세력균형」을 뒤엎었다.미국이 과학연구에 주도권을 쥐면서 영어는 「과학언어」로 자리잡았다.국제학술회의에서 연구논문들은 모두 영어로 발표된다.독일어.프랑스어로 논문을 써내도 학술지 편집자들이 영어로 번역 해 싣는다.
영어는 「새로운 라틴어」라고 한다.라틴어는 로마제국이 멸망한후에도 살아남았다.미국의 과학적 리더십이 쇠퇴해도 영어는 과학언어로 살아남는다는 비유다.글로벌 정보네트워크로 세계가 연결되면서 「영어독점」은 가속화한다.유통되는 정보의 90%이상이 영어다.네트워크 사용자의 50%이상이 미국 바깥이란 사실이 더 놀랍다. 지난해말 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47개국 지도자회의에서 『영어가 정보초고속도로에서 계속 판을 친다면 우리 미래 세대들은 경제적.문화적 주변으로 밀려나고 만다』고 경종을 울렸다.
인터네트 언어는 난해한 영어투성이다.대중적인 정보검색시스템인고퍼(Gopher)는 들쥐류 동물이다.이 시스템을 개발한 미네소타대학의 상징이 「고퍼」다.정보를 「찾아나선다」(go for)로 쉽게 외운다.영어단어의 첫 머릿글자만 딴 합성어도 판을 친다.억울하지만 도리없이 익혀야 한다.
「언어 제국주의」나 「또 다른 아메리카화」의 우려도 고개를 든다.식민주의는 중앙집권적 사고(思考)의 산물이다.중앙의 통제가 없고 다변화.분권화돼 가는 디지털세계에서 영어는 지배수단이기 보다 편리한 매개물(medium)이다.국수(國 粹)주의와 제국주의는 구분돼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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