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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6> 추미애 민주당 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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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004년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이후 당시의 정통 야당이었던 구 민주당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 민주당의 잔다르크라 불리던 추미애 의원이 눈물의 삼보일배로 총선에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민심은 냉담했다. 추 의원도 민주당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4년.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18대 총선, 민주당 대표경선 등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며 추 의원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최근 참석한 촛불집회에서 일부 시민이 ‘탄핵녀’로 지칭하며 보였던 거부반응처럼 그가 당시 ‘탄핵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 여전히 큰 짐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추 의원에게서 당시의 상황과 민주당의 진로, 유력 차기 주자로서의 꿈과 고민은 무엇인지 솔직하게 들어보기로 했다.

그 때문에 이번 인터뷰는 정치인 추미애의 내공과 그릇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 하고, 독자에게는 그의 ‘한계와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도구가 돼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 인터뷰는 한 줌의 의미도 없다.


1. 영남의 딸, 호남의 며느리

Q: 보수적인 대구 문화에서 여학생의 서울 유학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서울로 간 것은 본인 선택입니까? 더구나 어려운 집안환경에서 사립대학 진학은 무리가 아니었습니까.

경북여고 3학년 때 한양대에서 지방 우수학생 유치단이 왔어요. 그때 한양대를 지원하면 4년간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지원해준다고 해 서약서를 썼죠. 어차피 대학은 혼자 힘으로 마칠 생각이었거든요.

Q: 추미애 의원을 얘기하려면 부군인 서성환 변호사를 빼고 얘기할 수가 없는데요. 서 변호사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맞아요. 학생 시절엔 정신적 지주, 지금은 동지적 관계랄 수 있죠. 제가 사회적 문제에 눈을 뜨게 해준 인도자였어요.

Q: 두 분의 결혼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죠? 이미 사법고시를 패스한 대구 출신 추 의원과 여전히 고시 준비생이던 정읍 출신 남편이 결합하는 데 집안의 반대도 만만찮았다는데요.

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데다, 말씀대로 남편은 아직 고시 준비생이었으니 쉽게 허락받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그 문제는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갔죠.

Q: 법관 시절 꽤나 골치 아픈 판사로 알려졌었다는데요.

전두환 정권 시절에 춘천지법의 영장전담판사를 할 때였어요. 영장이 청구됐는데 학술서적들을 불온서적으로 압수수색한다는 거예요. 기각했더니 한밤에 경찰서장이 전화해 고압적으로 따지더군요.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하고 거절하니 다음날 윗분이 절 부르더군요. 아버지 같은 경찰서장에게 왜 대들었느냐고요. 어이가 없었어요. 결국 영장은 재청구되었고, 다른 판사가 발부했죠. 제가 문제 판사로 여겨졌다면 그런 일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Q: 소위 의식 있는 판사로서 당시의 고뇌는 어떤 것이었죠?

그 당시는 시국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말로 소위 ‘미나이데’ 판결, 즉 보지도 않고 판결하는 관행이 있었어요. 검사가 주문한 대로, 피고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내리는 판결이죠. 저는 젊은 양심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들어주려 했어요. 아무리 그래 봐야 법률 범위

안의 재량이었죠. 법관은 법에 따라 판결하는 건데 법이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도리가 없었어요. 그 과정에서 시대에 대한 고민이 가슴속에 차 올랐죠.

Q: 그 ‘시대의 고민’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내가 나서서 바꾸자. 뭐 이런 거였나요.

보통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 하죠. 문제는 그 판결문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적혀졌을 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생기는 거예요. 하지만 당시의 법은 통치자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기계적인 법이었어요. 사법부는 시대를 절규한 사람들을 법이라는 도구로 기계적으로 재단하면서 ‘우리는 판결로 말했다’고 자위했던 거죠. 저는 판사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할 때만 판결로서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고민의 실체였죠.

Q: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정치 입문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왜 추 의원을 지목했다고 생각하세요? 영남 출신 여성 판사라는 점이 이유가 된 건가요.

그 이유는 제가 모르죠. 다만 나중에 당시 광주고법 부장판사께서 저를 추천하셨다고 들었어요.

Q: 왜 국민회의 전국구를 마다하고 굳이 지역구를 택했습니까? 더구나 첫 여성 부대변인도 여성이라는 게 이유라면 실수라고 말했다는데요.

“여자의 한계야”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어요. 선구적 여성으로서 내가 흐트러지면 여성이라는 존재가 위축되죠. 여성도 잘 해낸다는 것, 그건 후배 여성들에 대한 책임이기도 했죠. 물론 임명직에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만 저는 임명직에 도전한 게 아니잖아요. 경쟁의 무대에 서면서 영남 출신이라고, 여성 판사라고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또 받아도 안 되는 거죠.

Q: 그 말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역설적인 자격지심으로 들리는데요.

천만에요. 여성은 사랑을 잉태하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사랑을 열매 맺게 하고, 양육하는 존재죠. 이건 중요한 경험이에요. 사람이 인간으로서 자기를 들여다보는 ‘각성의 단계’예요. 나 아닌 다른 생명을 통해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거든요. 그런데 여성의 그런 소중한 경험을 가볍게 여기는 문화가 있어 왔어요. 그래서 여성은 항상 뛰어넘어야 할 ‘내’가 존재하죠. 보호색 없이요. 그 때문에 여성 프리미엄을 안 받겠다고 한 거죠.


2. 민주당의 잔다르크

Q: 구 민주당이 분당될 당시 구세력들을 포용하면서 민주당 잔류를 결정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지금까지 말한 소신과는 약간 어긋나는 것 같은데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낮고 회복 기미가 없으니까, 시니어들을 중심으로 후보를 단일화하자는 소위 후단협이 만들어졌죠. 그 바람에 처음에는 삐끗했지만 나중에는 그분들도 다들 열심히 뛰었어요,

Q: 당시 조순형·박상천·정균환·한화갑 전 의원 같은 분과 정치적 코드가 맞았나요? 그 말은 그들과 정치적 견해가 일치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제가 중시한 것은 ‘분열 없는 통합’이었어요. 제가 정치에 처음 뛰어들 때, 세력이 약한 ‘정통 야당 세력’을 호남이 보호해 주는 것을 보고 국민회의에 뛰어들었어요. 호남이 영남 출신 노 후보를 광주 경선에서 1위로 만들어 준 마음도 그때와 같은 것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지켜온 정통 야당을 차마 분열시킬 수 없었어요.

Q: 당을 분열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저는 마지막까지 분당이 아닌 개혁을 주장했어요.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을 개혁하면 되잖아요. 그러지 않고, 누구와는 도저히 개혁을 못하겠다고 한다면 분열주의적 발상이죠. 제가 분열에 반대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민주당의 ‘적자성’을 지키고 ‘정통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결국 갈라졌죠. 지금 보세요. 다시 합쳐졌잖아요. 그런데 분당해 나간 대통령이 자꾸 민주당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니까 민주당의 시니어 그룹들이 도저히 안 되겠다, 탄핵해야겠다고 하더군요.

Q: 그래도 그것이 추 의원이 탄핵까지 찬성할 명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분당 후 저는 민주당이 사는 길은 개혁성에서 앞서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했어요. 그러자 당에서 조순형 의원은 대표를 하고, 저는 원내대표를 맡으라고 제안하더군요. 그때 제가 “지금이 그럴 때냐, 전당대회를 열어 당원들의 자존심을 살리고 개혁의지를 보여줘야 할 때다”고 거절했죠. 결국 전당대회를 했고, 조 대표가 1등, 제가 2등을 해 최고위원이 됐어요. 그런데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자 조 대표가 탄핵으로 가자고 계속 설득하더군요.

Q: 그럼 추 의원께서 조순형 대표의 설득에 넘어간 건가요.

고민스러웠죠. 개인의 소신과 당 최고위원으로서의 입장이 상충된 거죠. 노 대통령에게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라는 발언을 사과하면 탄핵을 철회하겠다고 제안했어요. 하지만 거부당했죠. 그때부터 선택의 폭이 좁아졌어요. 당의 2인자가 이 상황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배신자가 되는 거죠.

Q: 이정일 전 의원은 조순형 대표가 탄핵에 찬성하지 않으면 공천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던데요.

조 대표가 탄핵에 동의하지 않은 6명 중에서 5명에게 공천을 주지 않겠다고 압박한 건 사실이에요. 물론 제게는 못 그랬죠. 그때 조 대표에게 ‘시대의 양심이 되십시오’라고 탄핵불가론을 주장하는 제게 공천 협박을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Q: 일각에서는 그것이 DJ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었냐고도 하는데….

김 전 대통령은 ‘분단시대의 정치적 의미’를 유일하게 말씀하신 분이죠. 시대를 같이 아파한 분이기도 하고요. 더구나 그것을 개인의 아픔으로 그치지 않고 승화한 분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은 김 전 대통령이지, 민주당의 성과가 아니에요. 저는 사람 설득의 가장 큰 원리는 ‘소신에 뿌리한 건강성’ 이라고 믿어요. 저는 민주당이 복원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던 거죠. 정치를 하는 것이 권력욕이나 출세 지향 때문이라면 잘못된 일이듯, 정치적 판단도 마찬가지예요.

Q: 어쨌거나 결국 탄핵에 참여한 모양새가 됐고, 그 후 삼보일배를 통해 탄핵에 대해 사과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탄핵의 상징처럼 돼 버린 측면도 있지 않나요.

이유야 어떻든 국민을 불편하게 해드렸으니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통령은 헌법기관이에요. 한데 그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헌법의 수호자’가 아닌 ‘정치인 노무현’을 자처했어요. 스스로 내려온 거죠.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심판자는 국민이죠. 비록 대통령이 그랬어도 국민의 입장에서 법익은 탄핵보다는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었어요. 민주당은 그런 국민의 판단을 거역했고요.

Q: 그런데 왜 혼자 삼보일배를 하면서까지 사과를 했나요? 혹시 ‘나는 억울하다’ 뭐 이런 심정이었나요.

탄핵 이후 총선 국면에서 민심이 표출됐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여론조사 결과가 심각해졌어요. 저는 그럴수록 개혁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는 모두들 자기 지역구로 도망치다시피 해버렸어요. 국민의 분노가 엄청났죠. 당사에 사람이 없었어요. 당장 자신들이 떨어지게 생겼으니까요. 저까지 그럴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당의 선대위원장을 맡았고 역할에 충실했던 거죠.

Q: 남북 관계가 경색돼 있습니다. 과거 추 의원은 대북 송금 특검에 강하게 반대했는데, 대북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남북 관계는 공존 교류와 화해가 중요합니다. 노 전 대통령이 이제는 그 기조를 아무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어 놨어야 하는데 특검을 통해 원점으로 되돌려 버렸어요. 국민의정부에서 이룬 평화를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의 평화의 단계로 끌고가지 못한 거죠. 많이 아쉽죠.

Q: 노 대통령 당선 후 분당 반대, 그리고 대북 특검과 대연정,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최초로 문제를 제기하는 등 늘 대립각을 세웠는데요. 그럼에도 열린우리당과의 재통합에는 참여했잖습니까?

정치인은 이미지보다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정치인의 궤적은 족적과 같은 것이라서 긴 과정 속에 이미지가 표출되는 거죠. 저는 척박한 야당에서 출발해 세상을 바꾸는 일에 몸을 던졌어요. 옳은 일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대통합은 애초에 갈라지지 말았어야 할 원래의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당위였어요.

(최근 DJ의 복심이라 불리는 박지원 의원의 복당과 더불어, DJ의 정치적 수양딸이라 불리는 추미애 의원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추미애 의원은 미국 유학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장관직을 제의했지만 단호하게 사양했다고 말했다. 이유는 정치인은 사익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참여정부에 대한 이런 불편한 추억들이 남아있었던 탓은 아니었을까.)


3. 다시 돌아와 거울 앞에서

Q: 곤경에 빠진 통합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손학규 대표를 얼굴로 내세웠는데요.

정치란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죠. 그 때문에 인물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인물을 통해 대중을 흡수하죠. 저는 손 대표를 미워한 적도 없고 개개인에 대한 배제도 주장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손 대표가 스스로 민주당을 선택했다면 환영하지만 그것이 아닌 경우, 즉 정치환경이 유인했다면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손 대표가 입당해 교황 선출 방식으로 대표가 되기를 원했어요. 정치인은 말을 하면 지켜야 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국민과 당원에게 약속을 해야 합니다. 당당하게 ‘내게 기대를 가지라’고 하면서 지지를 요청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안 했어요. 그걸 생략했어요.

Q: 어쨌건 재통합 후의 민주당이 치른 18대 총선 결과는 참패였다고들 하는데요,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나요.

패배죠. 지지 세력에게는 항상 지지의 이유를 드려야 하는데 그걸 드리지 못했어요. 대표적으로 과거 노 전 대통령의 ‘대 연정제안’ 같은 것 때문이죠. 민주당 지지 세력의 특성은 명분을 중시하는 것인데, 그런 제안이 지지할 명분을 흔들어 버린 거죠. 그런데도 아직도 그걸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국민은 향수나 추억으로 투표하지 않아요. 미래를 보고 투표하죠. 우리가 늘 말하는 ‘과거에 민주화를 이뤄 낸 세력’이라는 얘기는 미래 얘기가 아니잖아요. 미래를 보여 주지 못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Q: 당시 외부 인사가 다수가 된 공천심사위원회가 지역구 공천을 좌우했는데….

비정상이었죠. 당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거지만, 저는 솔직히 심사 전날 긴장했어요. 심사위원 중 상당수가 비정치인이었으니까요.

(공천심사장에서 추 의원이 곤혹스러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워낙 당당하게 답변하고 나가자, 공심위원장이었던 박재승 변호사를 비롯한 외부 공심위원들에게서 ‘대단한 소신이다’ ‘민주당 후보를 통틀어 가장 강단 있다’는 평이 쏟아졌었다.)

Q: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 출마의 변으로 “조직과 계파로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사람들이 민주당 위기의 실체다”고 말했는데요.

민주당은 앞으로도 수시로 우리가 어떤 당이었나, 갈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미래 진로 설정을 위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건강성 확인이 먼저 필요하죠. 건강한 주도 세력들이 그런 고민을 수렴하고 끌어갈 때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고요. 그 점에서 이번 전대 결과는 아쉽지요.

Q: 영남의 딸, 호남의 며느리라는 추 의원의 독특한 입지를 두고 일각에서는 ‘영남의 가출한 딸’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요.

영남은 예전에는 권력을 비판하는 데 날카로운 감시자 역할을 자임했어요. 역사를 보더라도 조선시대 사림이 그랬고요. 그 뿌리를 보면 영남은 권력에 편승하거나, 덕을 보려 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앞으로 영남이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고향에 가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이 이해해 주시죠.

Q: 공천심사 때 추 의원의 성격이 워낙 불 같아 보좌관, 심지어 운전기사까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글쎄요. 제가 워낙 많이 움직이고 일을 많이 하니까. 업무량이 적지 않죠. 그래서 일이 힘들면 그만두는 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루머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 불찰이겠지만저로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추 의원이 17대 총선에 떨어진 다음 함께했던 보좌관들의 퇴직금을 정치자금으로 지급했다가 추 의원의 회계 책임을 맡았던 서 변호사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일이 있었다.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 점에 비춰 보면 이 부분은 적어도 과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한편으로는 정치인 추미애에게 적지 않은 적이 있음을 시사하는 하나의 방증일 수도 있다.)

Q: 2001년 이문열씨와 ‘곡학아세’ 논쟁이 붙었을 때 ‘기득권층에 영합하는 야만적 지식인’이란 표현을 썼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개인이건 집단이건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기성찰과 반성이 중요하죠. 이것이 잘 안 될 때는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성역 없는 지식인의 비판이 필요해요. 더구나 대중성 있는 지식인의 경우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책임이 더 크죠. 그 점을 지적한 겁니다.

(2001년 7월 이문열씨의 칼럼을 두고 추 의원이 ‘곡학아세(曲學阿世)’라고 비판하자, 이문열씨는 단장취의(斷章取義)의 혐의가 짙은 망발이라고 반박하며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Q: 이명박 정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사실 저는 처음부터 대운하 같은 것은 산업화 세력의 발상이라 지적했고, 그런 발상으로는 우리 경제를 이끌어 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명박 정부의 핵심 정책인 감세정책은 철 지난 미국 정책을 모방한 데 불과합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감세정책이 검증된 성과 없이 양극화만 조장한다는 비판과 반성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죠. 그런 정책은 대안이 될 수 없어요.

Q: 마지막으로 정치인 추미애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부잣집 딸이건, 가난한 집 아들이건 누구나 똑같이 출발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수동적이고 시혜적 의미의 복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그게 제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마치며

추 의원은 과거의 거침없는 언사와 달리 내내 정제된 답변을 했다. 높아진 그의 위상 때문일까. 정치인을 상대로 한 인터뷰에서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기에 세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추 의원은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인 빅5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민주당 소속으로서는 손학규 전 대표와 추 의원 두 사람이 포함됐다. 하지만 최근 민주당 대표경선에서는 현저한 격차로 2위에 머물러야 했다. 추 의원의 강점이자 약점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강하고 뚜렷한 소신을 가졌지만 타협에 능하지 않은 강성 이미지를 가진 탓이다.

얼마 전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에서 추 의원은 가족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날의 눈물은 힐러리의 그것처럼 ‘미필적 고의’였을까, 아니면 앞서 그의 말처럼 강함 뒤에 감춰진 따뜻한 모성의 ‘승화된 눈물’이었을까. 정치인 추미애의 앞날은 바로 이 점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달라질지 모른다.

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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