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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감독 새작품 영화"축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한국의 상가풍경은 독특하다.빈소에서 잠시 엄숙한 몇마디의 조문을 건네고 돌아서면 떠들썩한 잔치판과 마주친다.
문상객들은 술잔을 돌리고 화투판을 벌이고 죽은 사람보다는 산사람 얘기 하기에 바쁘다.딱딱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결혼식보다오히려 더 활기에 차 있다.
파티처럼 결혼식을 올리고 엄숙하게 장례를 치르는 서구인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역설적이다.
6월초 임권택 감독이 내놓는 『축제』(태흥영화사 제작)는 이역설의 미학을 삶이란 큰 그릇으로 받아낸 수작이다.
영화는 팔순노인의 부음을 받고 집안 식구들이 모여드는 장면으로 시작해 장례식 절차에 따라 시간순으로 전개된다.
그 흐름은 세개의 지류를 타고 가다 나중에 하나로 합쳐지는 형식을 취한다.
얘기 전개의 기본 골격은 장례식 절차다.임감독은 속굉(屬紘)에서 반함(飯含)에 이르는 장례과정을 인류학 보고서를 쓰듯 자막해설을 덧붙여 가며 친절하게 이끌어 나간다.이 의식 자체는 죽음의 의식답게 엄숙하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윷.도박을벌이던 마을 주민들은 싸움을 벌이고 서울에서 온 문상객들은 아예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화투판을 벌인다.
상주인 준섭(안성기)은 심각한 어조로 조문하는 친구에게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술이나 마시라』고 말한다.
밤이 늦고 술이 거나해지면서는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까지 나온다.준섭의 집안 식구들도 노인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실익 챙기기에 바쁘다.
요란한 곡소리의 이면에서는 취직 청탁이 오가고 치매노인을 모신 공과를 두고 언쟁이 벌어지기도 한다.그런데도 추하지 않고 진솔한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형식인 동시에 살아 남은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 설득력있게 그려진다.그래서 문상객의 무례와 불손함도 따뜻한 유머로 용서된다.
이처럼 임감독이 장례식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과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에게로 반사돼 나온다.
집나간 이복 형제 용순(오정해)이 술고래였던 아버지의 묘를 찾아 오렌지와 수입초콜릿,헤네시 코냑으로 제상을 꾸미는 것도 그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수용된다.
요란한 곡소리를 듣고도 담담하게 상례를 치르던 준섭은 문상객들이 『차차차』를 부르며 노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눈물짓는다. 이 역설적인 삶의 단면들을 통해 임감독은 아름다운 삶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제시한다.그 비전은 상가풍경과는 별개로 삽입되는 동화부분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인 준섭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소재로 발표한 이 동화는손녀 은지의 시점에서 할머니의 소멸과정을 그리고 있다.할머니는은지에게 나이를 나눠주시다가 나중에 은지보다 작아지고 결국은 한마리 배추흰나비로 날아간다는 내용이다.
결국 이 동화는 삶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불러오는 순환의 한 장이며,효는 그런 점에서 생명이 흐르는 수로와같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제목 축제는 단순히 상가 풍경이 잔치와 같다는 차원을넘어 삶의 새로운 지평에 눈뜨게 해 준 장례식이야 말로 진정한한바탕 삶의 축제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서편제』의 원작자 이청준씨가 치매노인을 모셨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원작소설을 각색했으며 극중 동화 『할미꽃은 봄을 세는술래란다』도 이씨의 동화를 그대로 차용했다.『서편제』처럼 2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웃으면서 감동받을만한 영화다 .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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