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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 타죽은 가축들 마치 폭격 맞은듯-고성죽왕면 산불현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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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총소리만 없었다.산산이 부서지고 불타버린 산간마을은 영화에서나 보던 전쟁터였다.어디를 가나 매캐한 연기와 잿더미 뿐이었다.불길이 지나간 산과 자연부락들 그 어디에서도 푸른 색은 찾을수 없었다.선산은 물론 모판마저 한줌의 재로 ■ 했다.
지난 23일 죽왕면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은 사흘만에 가까스로불길이 잡혔으나 상채기는 이처럼 너무 컸다.
죽왕면삼포1리 한 자연부락.이곳은 유명 관광지인 삼포해수욕장에서 서쪽으로 불과 5백여 떨어진 곳이다.
어(魚)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이번 산불로 전체 36가구중 31가구가 불에 타고 소 20여 마리가 떼죽음당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단 한명의 주민도 숨지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길이 거의 잡힌 25일 오후 마을 가까이에 있는 논바닥엔 뜨겁게 몰아닥치는 불길을 참지 못해 들판을 헤맸던 것같은 암소한마리가 큰 눈을 부릅뜬채 숨져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긴급히 대피했다가 마을로 돌아온 10여명의 주민들은 불길 속에서 연기에 질식되거나 타 죽은 소.닭 등 가축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비록 짐승이지만 불길에 생목숨을 빼앗기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 이장 魚명현(37)씨는 발버둥치다 숨진 흔적이 역력한 죽은 소 한마리를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화마가 평온한 이 마을을 덮친 것은 24일 오전1시쯤.봄농사준비로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불 속에 묻고 잠들었던 주민들의 귀에 『대피하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여왔다.이장 魚씨가 면사무소의 비상연락을 받고 주민들을 대피시키 기 위해 목이터져라 외친 소리였다.
집 마당에 나온 주민들은 마을 뒷산이 온통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는 혼비백산해 삼포해수욕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반신 불수인 장모를 모시고 대피했던 주민 魚기택(38)씨는『이장의 다급한 고함소리를 듣고 마당에 나가보니 뒷산에 거대한불기둥이 솟아오르고 불똥이 수십씩 날아다녔다』며 당시의 위급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또 불이 붙기 시작한 24평짜리 집을 뒤로 하고 남편과 함께경운기 1대와 황소 한마리만 끌고 불구덩이에서 벗어났다 돌아와폐허로 변한 집을 돌아본 이귀녀(李貴女.61.여)씨는 『새끼를밴 암소 5마리는 타죽었고 해마다 송이를 따 던 야산은 숯밭으로 변했다』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나 둘씩 집을 찾아 돌아온 주민들을 맞은 것은 암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다.주민들은 한결같이 『이제 어떻게 살아지 앞이 캄캄하다』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은 물론 올해 농사용으로 준비해둔 모판과 융자를 얻어 구입한 경운기.소 등 농사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불에 타 당장 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고성=홍창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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