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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의 明暗 비정규직] 上. 노사 모두에 차별 받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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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 지난 7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자동차 문 조립라인. 주로 20대 초반의 하청업체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나사를 조이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올해 노동계의 화두는 단연 '비정규직 근로자'다. 양대 노총은 일찌감치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처우 개선'을 올해 임단협의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걸었다. 민주노동당도 이 문제를 주요 노동 현안으로 꼽고 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하지만 노사 간의 견해 차가 워낙 크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해결안을 내놓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현주소와 해결방안을 짚어본다. [편집자]

"비정규직이 되니 휴게실부터 달라지더군요. 정규직 휴게실은 에어컨에 샤워시설도 좋지만 이곳은 선풍기 하나 달랑 달려 있고 샤워시설도 낡아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한진중공업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A씨. 2002년 경제사정으로 희망 퇴직한 뒤 하청업체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했다. 그는 비정규직이 된 순간 여러가지가 달라졌다고 한다.

"특수한 기술이 필요한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임금이 크게 낮습니다. 또 휴일에 근무하는 경우가 많은데도 특근수당이 나오지 않습니다."

A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역할 차이에 대해 "일은 거의 같다"고 말한다. 흔히 비정규직은 단순 작업, 정규직은 기술이 필요한 작업을 한다지만 사실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크레인 작업 등 위험한 일은 하청업체 비정규직이 떠맡는다고 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를 실감하는 사람은 A씨뿐 아니다. 물론 차별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노조들이 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는 여전히 큰 상황이다. 사업장에 따라선 식당.통근버스.샤워장 등이 분리돼 있기도 하다. 한 하청업체 비정규직 근로자는 "목욕탕 관리인이 '하청 직원만 보고 문을 열 수는 없다'고 해 페인트 묻은 시커먼 얼굴로 퇴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탓에 비정규직들은 자신 스스로를 '2등 노동자'로 부른다. 회사는 물론 정규직과 그들이 조직한 노조도 특권층으로 비친다는 얘기다. 정규직은 집단의 힘을 배경으로 사측에서 여러 혜택을 얻어낼 수 있지만 비정규직은 불안한 신분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과학실험 보조교사로 8년 동안 근무해온 李모씨는 지난해 2월 말 학교 측에 임신 사실을 알린 뒤 해고 통보를 받았다. 李씨는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에 진정한 끝에 계약이 갱신돼 출산한 뒤에도 계속 근무하고 있다.

대부분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출산은 곧 해고를 뜻한다. 그래서 영양사.조리사.실험보조교사들 사이엔 '아이도 방학 때 낳아야 된다'는 서글픈 농담이 돌고 있다.

민주노총이 지난 2일 펴낸 '사내 하청 비정규직 차별 사례집'에는 법정 최저 근로조건에도 못 미치는 환경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인천의 한 대학교에서 건물 청소를 하는 환경미화원들은 10년 이상 일해 온 장기 근속자들이지만 임금은 항상 최저임금 수준이다. 1년마다 계약이 갱신돼 근속 연수가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경우 사회보험도 가입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통계청 조사를 토대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임시.일용직의 사회보험 가입률은 국민연금 26.4%, 고용보험 26%, 건강보험 28.9%에 불과하다.

대형 할인점 식품매장 판매사원인 金모씨는 "회사 측이 4대 보험 의무 가입을 회피하기 위해 1년짜리 촉탁직으로 계약 변경을 요구해 거부했더니 그만두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위험한 작업을 많이 하는 비정규직은 산업재해에도 취약하다. 또 산재를 당하더라도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이에 비하면 정규직은 훨씬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노조단체가 비정규직 보호를 요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취약계층 보호가 큰 명분이다. 약자 보호라는 대원칙엔 누구도 이의를 달기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정규직이 스스로의 권익과 지위를 크게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일부에선 노조가 세력 확대를 위해 비정규직을 끌어안으려 한다는 분석도 한다.

이 때문에 재계는 추가 부담이 늘어난다며 반대하고 있다. 재계는 정규직의 지나친 고용 보호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정규 근로자에 대한 고용보호 규제가 27개 회원국 중 둘째로 강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 황인철 사회정책팀장은 "경영상의 해고요건을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의 처우를 정규직에 맞춰 일방적으로 높이기보다 정규직에 대한 과도한 보호도 함께 풀자는 주장이다.

정부는 어떤 입장인가. 지난해엔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꺼냈다가 스스로 거둬들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구상이라고 본 것이다. 지금은 비정규직이 취약계층인 만큼 보호해야 한다는 게 기본입장이다. 이를 위해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꿀 방침이다.

◇특별취재팀=임봉수.정철근(정책기획부).김승현(산업부) 기자<lbsone@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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