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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에 얹힌 특별한 편지낭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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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달 말 시작한 대관령 국제음악제의 9일 저녁 무대. 용평리조트 눈마을홀 무대에 오른 작품은 한국계 미국 작곡가 얼 킴(1920~98)의 ‘린다에게’였다. 아시아 초연이었다. 미국의 여류 시인 앤 색스턴이 딸에게 실제로 보냈던 편지 텍스트에 얼 킴이 곡을 붙였다. 장르 구분을 깨고 음악과 텍스트의 연계를 시도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묵직한 첼로의 음색이 무대를 휘감기 시작했다. 첼리스트는 거칠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공포를 표현했다. 음정 없는 북소리가 첼로 연주를 갑자기 중단시켰다. 그리고 관객의 시선은 배우 윤여정(61)씨에게 집중됐다. 그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결심하고 딸에게 편지를 보내는 엄마 역을 맡아 무대에 섰다. 첼로, 피아노, 타악기, 플루트의 음악 사이사이에 대사를 넣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편지는 담담하게 시작됐다. “나는 지금 세인트 루이스로 가는 비행기 안이야.” 흑백의 간결한 옷을 입은 윤씨는 높은 의자에 앉아 눈 앞 악보에 시선을 고정했다. “네가 마흔 살이 되면 나와 얘기하고 싶고 나는 대답하고 싶겠지. 이건 잊지마.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는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 청중의 감정이 흔들렸다.

“인생은 쉽지않아. 끔찍하게 외롭지. 네가 어디에 있든, 나의 시에, 너의 마음에 말을 걸으렴. 나는 네가 나를 원하는 모든 곳에 있단다.”

윤씨의 목소리엔 고통과 사랑이 함께 실려있었다. 10여 분 길이의 작품은 “러브(love)” “유(you)”를 세 번 반복하면서 끝났다. 사이에 피아노의 화음이 불안하게 끼어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수 초 동안 청중은 박수를 아꼈다. 마지막 대사의 여운이 끝나고서야 환호가 터졌다.

공연을 마친 윤씨는 “홀가분하다”고 했다. “음대 문간에도 못 가봤잖아요. 악보를 알겠어요, 음악을 알겠어요. 처음에는 피아니스트 신수정(66) 선생님이 ‘있는 대로 읽기만 하면 돼’라고 말해 시작했어요. 첫 연습을 한 뒤 ‘음악을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신 교수님께 밤새 레슨을 받았죠.”

윤씨는 린다의 최근 소식을 듣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했다. “이 편지를 받았던 린다가 지금은 정신병동에 있다고 들었어요. 엄마가 이렇게 사랑해서 편지를 보냈는데,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

그는 이렇게 감정을 잡았다. 음악적 ‘지식’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엄마를 연기하는 데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 사람 그대로의 일이잖아요.”

사실 윤씨는 매년 열리는 대관령 국제음악제에 귀한 청중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에도 청중으로 대관령에 들렀다. “제가 이 음악제 상주악단인 세종솔로이스츠 팬이에요. 대관령뿐 아니라 서울 공연도 찾아갈 정도죠.”

연기경력 40년의 배우지만 첫 음악회에서는 ‘신고식’도 치렀다. 대사를 읽던 중 대사와 오선지가 함께 들어있는 악보가 무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를 순발력 있게 집어들었던 윤씨는 “순간 ‘여기서 장렬히 죽어야하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했어요. 주인공의 처절한 심정이 더욱 이해가 잘 됐죠”라고 농담을 건넸다.

‘린다에게’와 같이 텍스트와 음악이 결합된 작품에 또 출연하는 일에 대해 묻자 그는 “제가 어떻게…”라며 말을 흐렸다. 하지만 “정말 의미있는 무대죠?”라고 묻는 그의 눈이 빛났다.

대관령=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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