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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유럽 '2+4회담' 統獨에 결정적 기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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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미 정상(頂上)이 공동 제의한 4자 회담은 과거 동.서독이 통일을 이루기 직전 관련 당사국들이 개최했던 「2+4」회담을 떠올리게 한다.
「2+2」를 주축으로 한 우리의 4자 회담과는 비록 그 배경이 약간 다르나 독일의 경험은 많은 참고가 된다.
90년 동.서독과 2차대전 전승 4개국(미.소.영.프랑스)이참가한 이른바 「2+4」회담은 독일 통일과 관련된 문제 해결에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이 회담은 독일 통일에 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국제적 승인과 냉전체제 종식을 가져왔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2+4」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시작됐다.독일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옛 소련은 더 이상 대세를 외면하지 못하고 독일 통일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3개월 후인 90년 2월10일.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주도하던 고르바초프 정권은 모스크바를 방문한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와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에게 독일인의 자결권을 인정한다는 중대한 발언을 했다.이어 겐나디 게라시모프 옛 소련 대통령궁 대변인이 독일문제 해결을 위한 「2+4」회담의 형식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사흘 후인 2월13일.캐나다 오타와에서 6개국 외무장관들이 「2+4」회담을 통해 독일 통일의 조건을 협의하기로 합의하는 등 회담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독일 통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출발한 이 회담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통 일로 야기될유럽안보환경의 변화였다.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입과 옛소련의 안보 보장,폴란드와의 국경문제,독일의 군사적 지위 등이 집중 논의됐다. 독일 본에서 5월5일 첫번째 「2+4」회담이 열린 이래 베를린.파리에서도 회담이 개최됐다.
9월12일.모스크바에서 「독일에 관한 최종 합의 조약」이 체결됐다. 이 회담이 마무리된 지 한달도 못돼 독일 통일은 10월3일 극적으로 이뤄졌다.
베를린=한경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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