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불패’의 교섭력 (1)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뉴스위크 2000년 8월 박재규 당시 통일부 장관은 북측 협상대표들과 종일 협상을 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두 달 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한 데 이어 이번엔 남북 외교단이 평양에서 만나 이산가족 문제, 남북 종단철도에 관해 협상 중이었다.

박 장관은 45층짜리 고려 호텔의 허름한 객실 침대에 몸을 눕혔다. 내일의 협상에 대비해 고단한 몸을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새벽 3시 박 장관은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전금진 북측 협상대표의 보좌관이었다. 박 장관은 별실에서 전과 마주 앉았다.

전은 1~2시간에 걸쳐 북의 입장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한국 대표단이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했다. “국민과 언론은 대표단이 낮에만 협상을 하고 밤에는 잠을 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24시간 48시간 또는 72시간 회의를 한다”고 박 장관이 말했다.

상식을 벗어난, 정말 북한다운 수법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과의 협상에서 그런 고정관념은 위험하다. 호전적이고 비합리적인 이미지와 달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 휘하 외교관들은 최소의 양보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교묘한 협상술을 터득했다. 불완전한 핵신고만으로 자국을 ‘악의 축’이라고 부른 미국 부시 정권으로부터 테러 지원국 해제를 이끌어낸 것도 그 덕이 크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외교 협상은 ‘살라미(소시지) 전술’과 ‘벼랑 끝 전술’의 특징을 지닌다고 분석된다. 살라미 전술은 살라미를 1장씩 얇게 썰 듯 야금야금 양보를 얻어내 상대가 깨닫지 못하는 새 많은 것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과거에도 국가 간 분쟁이나 권력투쟁에서 종종 사용돼 왔다.

▶협상의 최종 결정권자는 물론 김정일 위원장(왼쪽). 그의 지시를 받아 강석주 외무성 부상(오른쪽)이 협상 전략을 총괄한다.

벼랑 끝 전술은 상대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는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내비쳐 타협을 이끌어내는 수법이다. 199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거부해 핵개발 의혹이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른 이래 북한은 그런 전술들을 구사하며 협상의 주도권을 잡아 왔다.

그러나 미국 등의 나라가 지금껏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이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북한은 그것 말고도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협상단이 주도 면밀한 사전 준비를 거쳐 온갖 국면에서 교묘한 전술과 책략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대화에 임한다.

어린아이들을 굶겨 죽이고 핵을 앞세워 세계를 위협하며 이웃나라 국민을 납치한 나라가 국제사회에 원하는 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느냐는 반론이 틀림없이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초점을 협상 기술에만 국한한다면 북한의 태도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협상팀으로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뛰어난 협상술이란 교묘한 화술이나 심리적인 술책을 이용하는 건 아니라고 비즈니스 협상의 전문가는 지적한다. “많은 사람이 테이블에서 주고받는 것을 협상이라고 간주하기 쉽지만 실상 그것은 가장 중요도가 낮다”고 스위스의 비즈니스 스쿨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의 마이클 왓킨스 교수가 말했다.

“그보다는 사전 준비를 얼마나 철저히 하고 게임을 주도하기 위해 협상장 안팎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이느냐가 열쇠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협상술은 아주 뛰어나다.”

▶현 6자회담 수석대표 김계관(왼쪽)과 북한 제일의 미국 정책통인 이근 외무성 미주국장.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은 간헐적으로 미국 정부와 대화했지만 진지한 협상이라기보다 주로 양측이 서로 허풍만 치는 선전·선동 전쟁이었다. 양국 간에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것은 불과 15년 전이었다. 1992년 핵 문제를 둘러싸고 개최된 북·미 협상이 출발점이었다.

서방세계와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북한은 협상의 기교와 자세가 세련되고 성숙해졌다. 준비단계로부터 협상의 기선 잡기, 회의장 밖에서의 분위기 조성, 최종 단계의 마무리까지 거래상대를 우롱하는 대기업의 베테랑 협상전문가처럼 북한은 협상의 모든 단계에서 교묘함을 발휘해 왔다.

어떤 협상이든 철두철미하게 준비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미리 분석해 둬야 한다. 협상하지 않고도 더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런 방법은 뭔지 분석해 상대의 이익과 입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협상이 결렬될 경우의 좋은 대안’을 의미하는 BATNA(Better Alternatives to a Negotiated Agreement)라 불리는 개념이다. 강한 BATNA가 있으면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다.

“별도의 선택지가 있으면 협상을 중단할 수 있다”고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협상 전문가 로이 레위키 교수가 말했다. “북측에는 협상에 응하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여유가 있다.”

미국이나 일본, 한국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 2002년 이후의 핵위기 땐 부시 정권이 당초 쌍무협상에 적극 임하지 않은 탓에 북한은 그 사이에 핵무기 7~8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

“북한은 결국 미국이 자신들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강경한 자세로 협상에 임할 수 있다”고 90년대 핵위기 때 북·미 협상에 참여했던 게리 세이모어가 말했다.

협상이 시작되면 북한은 처음부터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인 요구를 내놓는다. 일례로 90년대의 협상에서는 당초 미사일 수출 중단의 대가로 연간 10억 달러를 3년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6자회담에서는 경수로 2기와 200만t의 연료 지원, 테러지원국 해제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다른 국가라면 불합리한 요구로 협상을 시작하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한은 걱정이나 수치심은 조금도 없이 어쩌면 그들 자신도 잘 알면서 불가능한 요구를 늘어놓는다”고 클린턴 정권 시절 협상을 담당했던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차관보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노림수는 뭘까? 기본적으로 국내외 지지를 얻으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다. 최고의 결과를 추구함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할 수 있다.

동시에 미국과 일본의 ‘적대정책’의 희생자라는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의 동정을 살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은 자신들이 약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현안을 먼저 다뤄야 한다고 우긴다. “아무리 우리의 의제를 그들에게 얘기해도 쇠귀에 경 읽기였다”고 박 장관이 말했다.

예전에는 북한이 협상 중 종종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의 몇몇 전직 외교관에 따르면 타협과 양보를 패배로 보는 북측 대표들이 ‘전투 모드’로 협상에 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자세는 합의를 목표로 하는 진정한 협상이라기보다 허풍과 선전·선동 전쟁에 가깝다.

▶지난 7월 14일 베이징에 모인 6자회담 수석대표들.

“예전의 북측 협상대표는 3류영화의 갱단 두목 같았다”고 한국의 박 전 통일부 장관이 말했다. “의자에 깊숙이 기대 앉아 ‘한판 붙어보자는 거야’ 라는 투로 목소리를 깔았다.”

치열한 협상에서 그런 호전적인 자세를 문제 삼고 나서면 순진하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폭력만 빼고 어떤 수단도 정당하다”고 노스웨스턴 대학 켈로그 경영대학원의 협상 전문가 진 브레트 교수가 말했다. “반면 글로벌 비즈니스의 세계는 의외로 좁기 때문에 자신의 평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러 협상 경험자는 실제로 최근 몇 년간 북한의 협상대표들이 실용주의적이고 전문가다워졌다고 입을 모은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책상을 내리치는 일은 없다”고 6자회담에서 미국 측 차석대표를 맡았던 빅터 차 전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부장이 말했다.

“1990년대 그런 일이 몇 차례 있었고 현재의 협상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도 과거에 때론 그랬다고 들었지만 6자회담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협상대표가 아주 전문적이고 진지하며 집중력을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J-HOT]

▶ 하루 100명 밀었던 '때밀이 손' 매출 3000억 사장님

▶ 최강희 "어릴 때 홀로 된 엄마와 단둘이…"

▶ 최강희 "전 스태프와 잠 잔 적이 있는데…"

▶ 지한파 日교수 "日제품 많이 베끼는 한국, 중국엔…"

▶ 부부 4쌍 중 1쌍 스와핑 즐기는 콩가루 나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