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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선 회사 팔아먹는다 했지만, 결국 11억 시장 열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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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케이알 킴(K R Kim)’. 인도 가전업체 비디오콘의 김광로(62) 부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의 영문 이니셜이다. 케이알 킴은 인도에선 성공한 CEO의 대명사로 통한다. 1997년 1월 LG전자 인도법인장을 맡아 올해 초 그만둘 때까지 10년간 그는 LG를 인도 가전시장의 리딩 브랜드로 키웠다. 그사이 LG 매출은 360억원에서 1조8000억원(지난해 말)으로 뛰었으며, 컬러TV·냉장고·에어컨·세탁기·전자레인지에서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케이알 킴은 지난 5월 인도 1위 가전회사 비디오콘에 영입되면서 현지에서 또 한번 화제가 됐다. 한국인으로 외국 대기업 본사 CEO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래서 ‘수출 CEO 1호’라는 별명도 얻었다. 굴지의 인도 기업이 외국인 CEO를 수혈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비디오콘은 79년 설립됐으며, 석유·가스·가전·전력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해 그룹 매출은 45억 달러(약 4조5000억원), 가전부문 매출은 15억 달러가량 됐다. 비디오콘은 2006년 대우일렉의 인수합병(M&A)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어 한국에서도 낯선 이름은 아니다. 이 회사가 가전사업을 시작한 것은 87년. 프랑스 톰슨의 TV 사업부, 스웨덴 일렉트로룩스의 인도법인 등을 사들여 규모를 키웠다. 현재 인도 현지 가전업체 중 가장 큰 회사다.

지난달 25일 인도 뭄바이에 있는 비디오콘 본사로 김 부회장을 찾아갔다. 본사를 조만간 델리로 옮기기로 해 이사 준비를 하느라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한창 업무에 바쁠 오전 11시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김 부회장은 여유롭게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CEO는 아이들 맨(idle man·게으른 사람)이 돼야 한다”며 입을 열었다.

“투자의 대가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하루에 얼마나 인터넷을 할 것 같으냐. 그의 책상 위엔 컴퓨터가 아예 없다고 한다. 바쁜 게 선(善)이 아니다. 시장의 큰 흐름을 잘 읽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내가 시장을 보는 창(窓)은 신문이다. 지금도 세계 어디를 가든 (영자신문을 읽기 위해) 영어 사전을 반드시 챙긴다.”

-이제 친정 회사와 경쟁하게 됐다.
“(웃으면서) 희망 사항이라고 해 두자. LG전자는 비디오콘보다 30년쯤 앞서 있는 회사다. 그것보다 ‘CEO 수출’이 맞을 듯하다. 세계에서 뛰고 있는 한국인 태권도 감독, 양궁 감독이 얼마나 많으냐.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그런 인물이 나온 것으로 봐 달라.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서 활약해 준 덕분에 네덜란드 이미지가 좋아진 것을 봐라. 케이알 킴이 성공하면 인도에서 코리아 이미지가 올라가지 않겠나.”

그는 지난해 말부터 베누고팔 두트 비디오콘 회장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인도 언론이 그의 비디오콘행(行) 관련 기사를 크게 다루는 등 현지 반응은 호의적이다. 셰크하르 조티 비디오콘 부사장은 “케이알 킴은 어지간한 인도인보다 인도 지리에 밝고 시장도 꿰뚫고 있다”고 김 부회장을 평가했다. 실제로 김 부회장은 LG 근무 시절 인도 대륙 100여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현장을 지휘한 경험이 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영입 제의를 수용하기가 어렵지 않았나.
“(웃으면서) 도전 속에 행복이 있다. 같은 맥주라도 산 아래에서 마시는 것보다는 등산하고 나서 땀을 흠뻑 낸 뒤 마시는 것이 훨씬 시원하지 않나. 다행히 아내도 나의 도전을 응원해 주더라.”

-신임 CEO로서 주어진 미션은.
“그렇게 보는 것은 한국적 시각이다. 두트 회장으로부터 ‘특별히 이것만은 해 달라’고 얘기 들은 것이 없다. 내가 100% 맡아서 경영한다. 인도 기업 스타일이 이렇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아직 오픈 마인드가 부족하다.”

-그러면 스스로 설정한 미션은.
“브랜드 통합에 힘을 쏟을 것이다. 비디오콘이 M&A를 통해 성장하다 보니 6개의 개별 브랜드가 존재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각 브랜드가 생산·마케팅·영업에서 서로 경쟁했는데 이를 하나로 묶는 중이다. 또 다른 과제는 경영의 질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다. 임직원의 마인드 셋(mind set·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할 사명이다.”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가능하다. 인도에 오기 전 경남 창원 공장에서 전자레인지 사업부장을 맡은 적이 있다. 창원 공장의 생산성 혁명은 일본 도요타도 놀라워한다. 창원의 혁신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화(無化) 사상’에서 연유한다. 제로에서 다시 출발한 것이다. 무엇이든 부정(否定)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봐라, 제로에서 시작하면 새로운 길이 보인다.”

-LG전자 인도법인의 성공 비결이 있다면.
“나는 가급적 사람의 장점을 본다. 한국인은 인도인에 대해 말이 많고 게으르다고 탓한다. 또 책임지지 않는다고 힐난한다. 내가 보기엔 정반대다. 인도인은 생각이 다양하고 행동이 느릴 뿐이다. 지나친 책임을 물으면 주눅 드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믿고 맡기면 좋은 성과를 낸다. LG전자 인도법인엔 한국인이 22명, 인도인이 3000명가량 됐다. 대부분 해외법인은 주재원이 현지인에게 ‘명령’하는 구조로 움직인다. 나는 반대로 한국인 직원에게 ‘뒤로 물러나 앉으라’고 요구했다. 한국인이 설치면 현지인의 오너십이 작동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회사 팔아먹는다’는 말까지 나왔다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권한 위임을 해야 한다는 얘기인가.
“근사한 말로 해서 임파워먼트(empowerment·권한 위임)지, 기다릴 줄 아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먼저 상사가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자기는 70점밖에 안 되면서 부하 직원에게 100점을 요구하는 상사가 있다. 그러면 임파워먼트가 되지 않는다. 기대치를 70%로 낮추는 게 먼저다. 그러려면 참을성이 필요하다. 용서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용서하는 기업문화가 있으면 사원들이 용감해진다. 실수와 실책을 나무라지 않고 의욕을 북돋우면 서로 도전하겠다고 손을 번쩍 든다.”

이 대목에서 그는 기자의 수첩에 ‘무위이 무불위(無爲而 無不爲)’라고 적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하는 것이 없기에 아니 하는 것도 없다’는 뜻이란다.

“노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무위로 해야 한다고 했다. 유위(有爲)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최고권력자가 모든 힘을 꽉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큰 착각이다. 새벽에 회의 소집하고, 일주일 내내 밤늦게까지 불 켜 놓고 일한다고 실적이 하루아침에 좋아지진 않는다.”

-부하 직원에게 너그러운 편이라고 생각하나.
“그 반대다. 나는 공격적이다. ‘노 퍼포먼스, 노 퓨처(No perfor mance, No future-실적 없이 미래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권한을 주되 엄정하게 책임을 묻는다. 임파워먼트가 성공하려면 중앙에서 강력한 기획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적절한 평가·보상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한다. 100% 신뢰하되 확실히 기강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말은 쉬워도 실행으로 옮기기는 어려웠을 텐데.
“그래서 성공적인 임파워먼트 경영은 ‘양손 경영(Ambidextrous management)’이다. 분권과 집중, 기다림과 채근이 균형을 맞춰야 한다.”

-한국 기업엔 임파워먼트 경영이 활성화하지 못했다.
“일부 기업에선 오너가 100%, 아니 110%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권력을 내놓지 않는다. 최고권력자가 설치면 아랫사람은 눈치만 보게 마련이다.”

뭄바이=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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