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골칫거리' 러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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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클린턴과 옐친대통령간의 비밀대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백악관이 발끈하고 나섰다.내용인즉 올 6월 러시아대통령선거에서 옐친 재선을 미국이 은근히 지원하는 대신 클린턴 출신지에 본사를둔 닭가공업체의 러시아 수출을 막지 말라는 정치 적 흥정이다.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보도가 모처럼 러시아 관련 얘깃거리가 되었지만 지난 수개월간 미국내 주요 언론 사설이나 전문가 견해란에 꾸준히 러시아의 장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실렸다는 사실에주목할 필요가 있다.이들의 우려는 작년 12월 러시아의회선거에서 공산당이 약진함으로써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보스니아사태와 대만해협에서의 군사긴장 등으로 (적어도 언론의머리기사에서) 뒷전으로 밀렸던 러시아가 여전히 미국의 골칫거리로 남는 까닭은 도처에서 발견된다.91년 옛소련의 공중분해를 재고(再考)해야 한다는 러시아하원 표결과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수의 급부상 등 소련의 소멸과 더불어 「역사의 종언(終焉)」으로 치부했던 공산당의 깊은 뿌리를 확인하는 미국의 당혹감은 상당하다.더욱이 러시아의 개혁이 미 국익과 직결된다는 논리위에IMF가입과 차관주선에 앞장섰던 미국에 개혁지향 고위관리들을 연이어 해임한 옐친의 조치는 일종의 배신행위였다.또한 이란에 대한 핵기술 수출은 핵비확산을 탈냉전시대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고 있는 클린턴행정부의 체면에 손상을 끼친 일이었다.94년 12월 러시아의 체첸침 공 묵인을 미국 외교정책의 가장 수치스런일로 비난하는 이들도 있으며 열흘뒤 중국방문길에 나서기에 앞서중국이 러시아외교의 가장 우선상대라는 수사(修辭)를 서슴지 않는 러시아의 음흉한 외교술책을 압도할 현실적인 수단이 미국엔 마땅치 않다.
러시아의 과거 동유럽우방들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시키는 것이 냉전이후 유럽지역에 평화정착을 위한 마무리 수(手)라고 보고 있는 미국이다.하지만 러시아는 미국의 시도를 서방세계의 러시아 흡수기도라고 반발하며 주민들의 결 속을 도모할흔치 않은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
과거로의 복귀,공산당 통치에 대한 향수(鄕愁),지도층인사들 사이에 점증되는 서방혐오 현상,극성부리는 범죄와 부패 등이 70여년에 걸쳐 뿌리내린 하나의 체제가 전환하는 과정에서 당연히예상되는 결과라고 하기엔 문제가 심각하다.앤서니 레이크 백악관안보보좌관이 최근 연설에서 지적한 바 『러시아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미.러관계 뿐아니라 세계평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힘겹게 들리는 이유는 러시아가 안고 있는 난제(難題)들이 전세계가 함께 풀어야 할 역사적 과 제기 때문이다.
길정우 在美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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