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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주말 산책] 어떻게 그 껍데기를 연단 말인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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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35면

친구들과 집에서 조촐한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 전날 밤 술이나 몇 병 준비해 두려고 대형 마트에 갔다가 해산물 코너에서 탐스러울 만큼 실한 대합을 발견했다. 그 옛날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대합탕이 떠오르며 침이 고였다. 어른 주먹만 한 대합을 쩍 갈라 싱싱한 살을 꺼내 그 자리에서 숭숭 썰어 작은 냄비에 담아 팔팔 끓였지. 가격표를 보니 두 개 담긴 한 팩에 5000원이 채 안 됐다. 싸기도! 당장 두 팩을 바구니에 담았다. 내친김에 꽃게탕거리를 양념까지 포장해 놓은 것도 하나 담았다.

그런데 계산대를 나서면서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 살아 있는 듯 혀를 조금 내밀고 있는, 이 완강히 닫혀 있는 대합의 껍데기를 내가 호락호락 열 수 있을까? 흡족하기만 했던 대합의 묵직함이 바위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아뿔싸, 언젠가 석화 한 박스를 샀다가 껍데기를 여는 데 실패했던 기억이 그제야 났다. 손만 잔뜩 베인 채 죄스러운 기분으로 내다 버렸었지. 이거나 그거나, 그래서 그렇게 쌌던 거야. 이번엔 버릴 때가 되기 전에 인심이나 써야겠다. 일단 한 팩은 아래층에 주자꾸나. 밤이면 밤마다 퉁탕거리며 뛰노는 우리 집 고양이들 때문에 내가 늘 송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아래층 집 사람들이었다. 정말 나는 이웃 복도 많지. 한 살짜리와 열 살짜리와 열다섯 살짜리, 세 마리 개를 기르는 그 가족은 내게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새삼 고마움에 가슴이 뭉클했다. 술도 한 병 곁들여 선물해야지. 마트 봉지를 든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겅중겅중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갔지만, 아래층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자정도 안 됐는데…. 나는 실망스러운 기분으로 대합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20 기본요리만 제대로 배워라! 요리, 다 된다』라는 길고도 긴 제목의 요리책을 펼쳐 보니, 모시조개에 찬물을 부어 중불로 끓여 꽃게탕 육수로 쓰라고 적혀 있었다.

오, 모시조개 대신 대합을 써먹을 수도 있겠군! 나는 대합을 한 개 씻어 냄비에 넣었다. 물이 펄펄 끓자 대합 껍데기가 저절로 쩍 벌어졌다. 어찌나 흐뭇하던지! 꽃게탕은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요리책에 적힌 대로 건져 뒀다가 다른 재료가 다 익은 뒤 섞었건만, 대합 살은 맛이 없었다. 그제야 내 머리에 께름칙하게 남았던, 포장지에 찍힌 품명이 떠올랐다. ‘개조개’. 대합인 줄 알았는데 개조개였던 거야. 그래서 그렇게 쌌던 거야.

친구들이 돌아간 뒤 인터넷으로 ‘개조개’를 검색해 봤다. 어? 개조개가 곧 대합이란다. 게다가 맛없는 게 특색이라고 콕 찍어서 밝힐 줄 알았는데, 맛도 좋단다. 허…개조개를 맛있게 조리하는 법 중에 하나가 마음에 와 닿았다.

도, 개조개를 다지다시피 잘게 썰어 참기름을 넣은 냄비에 다글다글 볶아 준다

레, 조선간장으로 간을 미리 한다

미, 조개 자체에서 물이 제법 나기 시작하면 불린 미역도 같이 볶아 주다가 물을 적당히 붓는다

파, 팔팔 제법 졸아들 때까지 푹 끓인다.

그래, 이거야! 너무너무 맛있겠다!! 개조개 미역국을 끓여서 나도 먹고 아래층 집에도 갖다 주자! 오, 이 하나 빠진 데 없는 그 커다란 조가비들, 바다의 선물. 그것도 버리지 말고 깨끗이 씻어 말려서 예쁜 그림이라도 그려 볼까? 아, 그런데…어떻게 저 껍데기를 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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