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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의원직 포기하고 전업농 택한 박경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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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사람을 찾아 헤매는 때가 있다.국회의원 박경수(38년 강원도 출생)씨의 경우가 그랬다.말이 복잡하고 번드르르해서 알 수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솔직하게 까놓고 말하고 있다고 하고 싶은데도 속내만은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 한국 농민이라 그런 것같다.이 사람의 공식적인 학교교육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89년 당시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원주에서 입후보해 돈 안쓰고 당선된 순수한 농민출신 국회의원이라고 신문.방송에서 진기한 일로 다루었다.국회의원 생활을 8년이나 했는데도 몸이나 말에 거들먹거리는 티가 조금도 없다.이 점만 보아도 하여튼 난사람이다.국회의원 정도 해먹기가벅찰 인품은 아닌 듯 보인다.YS는 그에게 이번 총선에도 출마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고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한국당 공천을 거절하고는 다시 순수한 농민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다음원주시부론면 자신의 논밭과 축사에서 경운기를 몰고다니며 토종 소.돼지.닭을 기르고 논밭 가는 일에 완전히 복귀해 있다.
국회의원 하면서도 틈만 나면 이곳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그가 말한다.
『저가 열세살이던 6.25동란 중에 부모님이 장티푸스로 돌아가셨어요.그 때부터 나무장사를 시작했습니다.면소재지까지 7㎞쯤되는데 매일 나무를 해 팔러 다녔어요.그 때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것이 지금도 그대로 이래요.중.고등학교는 강의록으로 끝냈어요.대학은 동양통신대학 농림학과를 역시 강의록으로 수료했어요.17세에 장가들었는데,처가는 살기가 그래도 괜찮아서 밥이라도실컷 먹으려고 처가살이로 들어갔지요.그 전에는 죽만 먹었지 밥이라고는 구경도 못하고 살았어요.
군대에 지원해 들어가 마치고 제대한 다음,그 때는 공탁금이 없었을 때니까요,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습니다.당선은 안될 것이지만 어려운 농촌을 호소하면 당선되는 이가 내 말을 국정에 좀 반영해주겠지 이런 기대는 했지요.겨우 9백40표를 얻었어요.지금 생각해도 기가 콱 막히는 숫자였습니다.그 다음 8대에 또 나갔는데 8백몇표로 저번보다 1백표가 줄었지요.자세히는 기억 못하지만 총 투표자수는 5만명 정도였어요.9대 때부터는 공탁금 때문에 못 나오고 계속 쉬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설 즈음 朴씨 동네엔 57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7년동안 동네에 장가든 청년이라곤 외지로 나가 사는 사람을 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이 때부터 그는 농촌청년 장가보내기 운동을 벌인다.
원성군 농우회(農友會)를 결성했다.동네 청년들과 산에서 칡뿌리를 캐 서울에 가 팔아 기금을 모았다.행상(行商)하는 김에 농촌청년 장가보내기 운동 전단도 돌렸다.
방송국에도 협조방송을 좀 해주십사 여러차례 들렀으나 수위실에서 번번이 내쫓기기나 했다.그는 방송국 직원들과 여러번 격렬한말다툼을 벌인 일을 이야기하는 끝에 다음 같은 사건을 들려 준다. 『어느 봄날 아침시간에 강원도원성군부론면이라는 데서는 그곳으로 시집을 오면 여왕과 같이 모신다고 합니다라는 방송이 나왔어요.그냥 시청자의 흥밋거리 삼아 방송한 것이 역력했어요.그런데 그 방송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와요.많이들 찾아왔 습니다.
1백30명쯤 됐습니다.동네에 장가 못간 총각은 80여명 됐는데처음에는 이 여자들을 다 어떡하나,이런 걱정들을 했지요.그런데이 여자들은 하나같이 농촌을 「전원일기」에 나오는 그런 낭만적인 곳으로 착각하고 있는 도시사람들이었 거든요.한 건도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은 다행히 칡뿌리 판 돈으로 만든 기금이 있었기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서울 YWCA를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사정도 하고 떼를쓰기도 해 처음으로 단체 지원자가 버스로 부론면을 방문하는 기회를 만들었다.국회의원이 된 후로는 중국을 다섯번 방문해 교포처녀를 국내 농촌으로 시집「모셔」오는 일을 벌였다.단단 히 효과를 냈다.
그에게 13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자초지종을 묻고 있었을 때 그를 태우고 내가 운전해 원주에서 그가 사는 부론면으로가던 자동차가 마침 중앙선 동화(桐華)역 앞을 지나려 하고 있었다. 자기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동화역에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린데서 시작됐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 한적하기 이를데 없는 동화역 앞마당에다 차를 세웠다.우리는 동화역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역장 유길섭씨가 朴의원에게 다정스럽게 인사를 하며 나온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서 있다.
역장은 내게 朴의원은 서울을 오르내릴 때마다 이 역과 열차를이용했다며 그가 이번에 출마하지 않는 것을 섭섭하게 여긴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동화역은 박경수씨의 집과는 80리 거리다.
집에서 이 역까지는 하루 네차례 다니는 버스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청량리역에 내리면 거기서 1호선 전차를 타고 대방역에서 내렸다.그는 국회 개회 동안은 광명시에 사는 딸네 집에서 묵으며 등원했다.
그는 자가용을 타지 않았다고 말한다.
철저하게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했다.
정치가 생활을 하는 동안 이것은 농사꾼이라는 자기의 특수 입간판(立看板)이미지도 지키고 선거운동에도 큰 보탬이 됐으리라.
그러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동안 그가 가외로 알게된 것은 사람들이 국회의원 금배지를 조금도 존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철저하게 대중교통 이용 그는 사람들의 이 마음을 금방 이해하고는 금배지를 양복 깃에서 떼놓고 다녔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그가 이번에 입후보를 고사한 것에는 정치에 관한 이런 국민적 실망에 대한 그의 동감이 근원적 이유가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그의 말을 듣자.
『87년 대통령 선거때 저더러 도와달라고 당시 민정당도 오고민주당도 오고 했습니다.농우회를 제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88년 총선 때는 혹 농촌운동에 뜻 있는 분이 입후보하면 그 분을 좀 밀어줘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분이 나온다는말은 없었어요.그 때가 봄철이었는데 밭에서 집 사람과 둘이 담배밭 거름을 내면서 「내가 한 번 또 나가볼까」라고 집사람에게말했더니「그렇담 해보구려」라며 찬성이었어요.』 이 대목에서 그는 행복하게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웃음을 껄껄 크게 웃는다.
남편이 국회의원 나가겠다는데 찬성할 여자가 전국에 몇명이나 있겠느냐면서.그가 말을 계속한다.
***공탁금 없어 병원장 신세 『그래서 제가 용기를 얻어 가지고 지금 자민련 소속으로 연세 제일 많은 국회의원으로 있는 문창모씨를 찾아갔어요.그 분은 원주기독병원을 만들어 원장을 하셨는데,지금은 의료보험이 있지만 그때는 없었던 때라 우리 동네딱한 환자가 생기 면 제가 그분한테 데리고 가서 떼도 많이 쓰고 그만큼 은혜도 많이 입은 분입니다.국회의원에 입후보하려는데공탁금이 없어 그러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더니,그분 말씀이 당신이뭐 국회의원에 당선되갔소, 그럽디다.당선은 못 돼도 농촌 문제를 호소해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서 그럽니다,하고 대답했어요.민주당 공천을 얻어오면 공탁금 마련에 힘이 돼 줄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박경수씨는 민주당 공천을 받으려고 무작정 동화역에서 청량리행 새벽 열차를 탔다.
그의 인생에서 국회의원 생활과 중앙선 동화역간의 철석같은 관계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114 전화를 걸어 통일민주당 전화번호를 알아 내어 위치를 물어본 다음 만리동에 있던 당사를 찾아갔다.그가 말을 계속한다. 『당시 김영삼씨와 김대중씨는 대통령 선거에 실패한 후라 김명윤씨가 총재 권한대행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총재실을 찾아갔더니 총재는 없고 젊은 사람 둘이 있었는데 제 이야기를 듣고는반말로 이 사람이 돌았나 하고는 상대도 안해주었어 요.작업복에농구화 차림이었으니까 그랬겠지요.내려가서 담배 거름이나 마저 내야지 생각하면서 돌아섰어요.그래도 아쉬워서 그날은 신답동 사는 작은 딸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관철동에 있는 김명윤씨 사무실을 알아 내어 찾아갔습니다.공천 은 다 끝났다는 그 분 말씀을 듣고 힘없이 돌아서서 층계를 내려오는데 비서가 나와서 다시 저를 불렀어요.김명윤씨 말이 중앙당에 가려는 참인데 같이한 번 가보자는 것이었어요.
중앙당에 갔더니 기자들이 공천자 발표를 언제 하느냐고 김명윤씨를 에워싸고 물었습니다.그 때 갑자기 金씨가 제 손을 잡고 한동안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갑자기 번쩍 쳐들며 「이 농사꾼의손을 보시오.우리는 이런 진짜 농군을 공천합니다 」고 기자들에게 외쳤어요.』 그가 타고난 운명은 이런 식으로 그를 국회의원이 되는 길로 인도했다.그러나 정작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그의 노력과 지략의 힘이었다고 보인다.
원주시내에 입후보자 선거사무실을 꼭 내야 한다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요청 때문에 군인도시 원주시내의 여인숙 2층에 둘 드러누우면 꼭 맞는 두개를 10만원에 한 달을 기한하고 빌렸다.5만원 내고 임시 전화도 한 대 놓았다.폐차장으로 보 내려는,한 쪽 문은 열리지도 않는 중고 포니를 8만원에 샀다.민주산악회 출신 운동원 다섯명이 첫사랑 같은 열정으로 그를 도와 선거 운동에 나섰다.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2백25표 차이로 현역의원인 민정당 후보를 가까스로 물리치고 당선됐다.朴의원은 말한다.
***정말 당선되면 어쩌나 걱정 『저는 농촌을 돌아다니며 국회의원 떨어지면 품앗이나 시켜달라는 등 농담을 하면서 일도 거들고 밥도 얻어먹으면서 선거운동을 했어요.입후보자는 저하고 단둘이었는데 상대방은 처음엔 저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어요.당선은문제 없고 전국 최다 득표에만 마음을 쓴다고 큰 소리를 쳤지요.제보가 들어오데요.민정당 후보가 가방을 선물로 수만개 만들어서 돌리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창고를 알아내어 경찰과 같이 가서선거 이전에는 열지 못하게 문에 봉인을 했지요.그래 놓으니 어떤 집엔 주고 우리는 왜 안주느냐는등 그 사람에 대한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그러고 보면 제가 당선된 것은 제가 잘해서라기보다 상대방의 이런 실수 때문이라고 봅니다.처음에는 제 최고 소망이 공탁금을 되돌려받는 3분의1 득표였습니 다.점점 당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국회의원에정말로 당선돼 버리면 그 때는 어떡하나 하는 태산같은 걱정이 새로 생겨났습니다.국회의원이 되고서도 자다가 밭에 가래질가야 하는 꿈을 꾸고는 깜짝 놀라 깨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는 YS가 JP를 축출한 것,쫓겨난 JP의 그 후 행동,DJ의정계복귀,이런 일을 보며 30여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3金정치가역겨워 더는 국회의원 노릇하기가 싫어지더라고 한다.
이 사람은 시골 정거장의 젊은 역장에게는「역장님,역장님」하면서도 정계 거물들 이름에는 서슴지 않고 「놈」자를 넣어 부른다. 14대 국회의원 2백99명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 본다면 사람답고 정직한 이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 뿐이더라면서,싫으면 가벼운 중이 떠나는게 옳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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