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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1만리>38.제2부 강서.안휘성-구화산 金지장보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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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서기 8세기초 어느날.안개가 자욱이 내린 황해의 파도 위로 조각배 한척이 흔들거리고 있다.뱃머리에는 흰털의 삽살개 한마리가 앉아있고 중간에는 한 승려가 지그시 눈을 감은채 명상중이다.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은지 오래지만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스쳐 지나간다.한때 그는 보위를 꿈꾸던 신라 왕족이었다.그러나속세의 영화란 부질없는 것.오대산에서 머리를 깎고 교각(敎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그리고 법명대로 중생을 那 르치기 위해 그는 지금 당(唐)나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는 중이다.
교각의 발길이 멈춘 곳은 지금의 안휘성 청양현 구자산(九子山)자락이었다.한없이 펼쳐진 강남의 지평선 한가운데 구름을 뚫고우뚝 솟은 구자산은 해발 1천3백42의 아름다운 산이다.아홉 봉우리에 18곳의 절경은 연못 위에 피어난 연꽃 무리 형상이다.연꽃에 담긴 뜻을 말함인가.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구(詩句) 하나가 입을 통해 전해오고 있었다.
「바위굴에 승려가 오는 날 구자산은 활짝 피어나리라(洞僧到來九子開花)」.
구자산에 처음으로 불법을 전했던 동진(東晋)의 배도(杯渡)화상이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천주봉 아래로 몸을 던지면서 남겼다는 시구다.
교각은 처음 천주봉의 석굴에서 백토(白土)에 쌀을 섞어 먹으며 참선했다고 『구화산 창건 화성사기』에 기술돼 있다.삼베옷을걸치고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았으며 속세의 굶주림을 생각해 항상 흙밥을 먹었다.교각의 이같은 고통을 참아내는 생활과 참선하는 모습은 말없는 가르침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뉘우침과 깨달음을주었다. 은은한 향기는 보자기에 싸도 10리밖에 퍼지는 법.제자들이 하나 둘 찾아들었고 이 가운데 지방 호족인 민공(閔公)은 대시주로 절을 지어주는등 정성을 다했다.신라에서도 제자들이건너와 불법을 청했다.
당나라 정원(貞元)10년(서기 794년?) 여름.교각은 제자들에게 고별하고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들었다.산이 울리고 돌이 굴렀으며,절 안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제자들은 시신을 석함에 넣어두었다가 3년이 지나 뚜껑을 열었다.그때까지 얼굴색은 마치산 사람 같았고 팔.다리를 쳐드니 소리가 났다.불경에는 시신에서 소리가 나면 보살이라 했다.이후 김교각은 지장보살로 불렸다. 구자산은 아미산.오대산.보타낙산등과 함께 중국 불교의 4대성지로 추앙받고 있다.이는 교각이 수도끝에 지장보살이 됐고,이로 인해 구자산이 지장 신앙처가 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구자산은 구화산(九華山)으로 불린다.이는 당나라때의 시성(詩聖) 이백(李白)이 천보(天寶)연간(서기 754년)에 구자산에 왔다가 산세의 아름다움과 상서로움에 취해 지은 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제 구강에 서서 저멀리 구화의 봉우리에 취해 노닐러니,은하수는 푸른빛 물기둥을 세워 아홉송이 연꽃을 걸어놓았네(昔存九江上 遙望九華峰 天河掛綠水 秀出九芙蓉)」.
취재팀이 구화산을 찾은 것은 양자강의 대홍수로 길이 군데군데끊긴 여름이었다.「검은색 지붕에 흰 담장(黑瓦白墻)」을 한 이지역 전통의 깨끗한 집들을 지나 구화산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계단의 연속이었다.교각이 참선했다는 천주봉 지장암은 한여름에도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치는 바위굴이었다.
석가모니 옆에 선 교각-지장보살은 5각의 오불관(五佛冠)을 쓰고 있다.삭발을 하고 왼손에는 보물구슬(寶珠)을,오른손에는 주석지팡이(錫杖)를 들고 있는 모습의 우리나라나 일본 지장보살상과는 사뭇 다르다.특히 중국인들은 이처럼 오불관 을 쓴 지장보살을 김지장과 동격.동일표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구화산 전체사찰을 대표하는 기원사의 인덕(仁德)스님은 『구화산 불교는 지장보살 신앙이 중심이고,지장보살은 신라국 김교각의 화신인 김지장 하나뿐』이라고 단언했다.
성불한 김지장의 육신이 모셔진 육신보전은 구화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김지장의 묘탑을 중심으로 8각7층으로 지어진 전각은 한창 보수중이었다.묘탑의 8면에는 층마다 불감을 설치해 지장상을 배열하고 있다.원래는 붉은색의 목탑이었으나 최 근 석탑으로개조됐다.
육신보전을 마주하고 지장보전이 위치해 있다.육신보전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셈이라면 지장보전은 김지장의 공덕력을 인격화해 봉안한 것이다.정중앙에는 개를 대좌로 한 견좌(犬座)의 좌상을 봉안하고 왼쪽 벽면에는 김교각의 수행과정을,오른쪽 벽에는 지옥중생 구제를 각각 채색부조로 나타내고 있다.수행과정에는 전설대로 뱃전에 앉은 교각과 흰 삽살개 모습이 그려져 있고 가사장삼을 던져 구화산을 덮는 모습도 보인다.
보살신앙은 대승불교의 소산이지만 지장보살신앙은 인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다.중국에서도 지장신앙의 뿌리가 4,5세기께 보이지만지장경에 의한 본격적 지장신앙이 형성된 것은 8세기에 이르러서다.바로 김지장의 시대다.여기에서 「지장보살=김 지장」의 등식이 성립된 배경을 살펴보자.
대승불교의 핵심은 보살도의 실천이다.문수보살.관세음보살.보현보살등은 석가의 구제력이 시대적.사회적 요청에 응해 분화되고 인격화해 나타난 현상이다.예컨대 석가의 구제력에서 지혜가 필요하면 문수보살,자비는 관세음보살,실천은 보현보살의 출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지장보살의 구제력은 출가자의 끊임없는 수행공덕력이고,이 점에서 김교각이 지장보살로 여겨지게 됐던 것이다.
이같은 지장신앙은 중국뿐만 아니라 대만.홍콩.싱가포르등 모든중국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중국인들의 가슴속에 김지장은 미륵불과 같은 신앙대상이 돼있다.94년은 김지장이 입적한지 1천2백년 되는 해였고 95년은 탄신 1천3백주년 이었다.이때 구화산에는 기념법회가 열려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 각국의 신도들이 모였다.최근에는 구화산에 90짜리 김지장 동상 건립을 추진중이다.아이로니컬한 것은 교각의 고향이자 불교신도가 가장 많은우리나라엔 김지장의 존재가 거의 알 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회는 「산수화의 요람 황산(黃山)」편입니다.
글=홍윤식(동국대교수) 사진=신인섭(양자강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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