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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淨化와 司正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80년대 5공초기에 미국 국무부와 서울의 대사관 사이에 오간외교전문들이 지난주 한국특파원들에게 배포됐다.문서들은 전두환(全斗煥)장군 등의 군부정권이 집권과정에서 빚은 정치적.사회적 소용돌이를 미국이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고,어느 정도 깊숙이 이 상황에 관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었다.
대부분은 정세판단 등 관찰수준의 보고들이었지만 어느 대목에서는 명백한 내정간섭도 마다하지 않았던 열강의 모습도 증언하고 있다. 거의 20년이 돼가는 서류들을 들춰보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마치 낡은 앨범의 빛바랜 사진에서처럼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있었던 지난날의 우화(寓話)들을 되새긴 일이다.
그중 하나는 5공초 全정부가 서슬이 퍼렇게 추진했던 사회정화(淨化)운동이었다.80년10월 어느날 서울 대사관이 워싱턴에 보낸 전문은 이랬다.『전두환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결혼식.
장례식과 기타 가정의례의 허례허식을 효과적으로 줄 일 수 있는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이에따라 법무장관은 지나치게 화려한혼례와 장례를 행하는 사례를 철저히 조사하고,가정의례 관련법규를 위반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처벌토록 전국 검찰에 지시했다.』 국민들의 「허례허식」을 엄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정화」의 장본인들이 뒷전으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동원해 상상도 못할 축재를 해놓고 요새 재판정에 오가는 모습을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릴 뿐이다.
특히 이 문서들이 우리를 안타깝게 만드는 대목은 처음부터 그「정화」가 외국의 관찰자에게는 조소(嘲笑)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다.全대통령의 엄중지시에도 불구하고 『군부 핵심세력인 김복동(金復東)장군의 부친 장례에는 국무위원 등 많은 요인들의 조화와 조의금이 답지했다』고 미 대사관은 본국에 보고하면서 이런 상황이 한국에서는 늘 반복돼온 과정임을 환기시켰다.
실제로 「정화」는 전두환정권에만 있었던게 아니다.박정희(朴正熙)정권에서는 「서정쇄신」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명칭만 진화를 거듭해 왔을 뿐이다.새로운통치자는 「악당」을 차례차례 처단함으로써 정권획득의 정당성을 만들어나갔다.이 과정에서 어느 때는 술집아가씨들이 한숨을 지었고,거리질서 회복 바람이 거셀 때는 택시운전사들이 피해를 보는등 으레 엉뚱한 희생자들이 생겼다.집권이래 정치자금은 한푼도 안 받고,골프도 안 치고,칼국수로 버텨온 김영삼(金泳三)대통령으 로서는 자신의 「사정(司正)」이 과거 정권의 「서정쇄신」「정화」와 같은 반열에서 거론된다면 불쾌해할 것이 분명하다.그같은 이의는 또 수긍할만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신(家臣)그룹 출신이면서 청와대속 자신의 무릎밑을 지켜온 측근비서가 수십억원의 축재혐의로 물의를 빚은 일은 「사정」의 체면에 먹칠을 한 격이라는데 입이 열이래도할 말이 없게 됐다.
「서정쇄신」「정화」도 초장부터 부패의 길로 줄달음질친 것은 아니었다.권력의 주변은 본질적으로 부패하고 싶어 환장하게 돼 있다.기회만 노리고 있을 뿐이다.과거 서정쇄신과 정화는 그 기회가 빨리,도처에 번졌을 뿐이다.「정화」당시 조소 를 보냈던 미국 대사관이 이번 대통령 가신참모의 부패혐의를 본국 정부에 보고하면서는 「사정」에 대해 어떤 조소를 보냈을까.
곧 총선거다.미국이 어떤 조소를 보낼까 상상해볼 것 없이 선거에서 우리 유권자는 金정부의 「사정」을 어떻게 평점할지 궁금하다.「사정과 부정부패의 척결」을 국정 목표로 내걸고 지난 3년간 수많은 고위인사에게 철퇴를 휘둘러온 金대통령 의 충정에 대해서만은 국민들의 평가가 여전할지 모른다.그렇지만 그의 무릎밑에 웅크리고 앉아 이권과 인사 등에 개입해 단꿀을 빨아먹는 주변인물들이 또 나온다면 결과는 가공스러울 것이다.주변에 대한재점검을 속히 강화하는 것만이 과거 정권과의 차별화를 기하는 길이다.
한남규 美洲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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