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식 대사 “수십 년 같이 산 내 아내를 자기 첩이라 우기는 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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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BGN의 독도 주권 표기 변경 사실을 뒤늦게 안 주미 대사관은 주말인 26일과 27일 미 관계 부처 실무자들의 휴대전화를 쉴 새 없이 두드렸으나 소용없었다. 28일 가까스로 연결된 미국 실무자들은 “이미 결정난 일이다.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태식 주미 대사는 제임스 제프리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부보좌관과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실에 면담 신청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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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제프리로부터 “들어오라”는 답이 왔다. 오후 2시10분 이 대사는 제프리에게 “한·일 간의 심각한 문제(독도)를 미국이 (표기 변경으로) 떠안겠다는 얘기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수십 년간 같이 산 내 아내를 다른 남자가 갑자기 자기 첩이라 우긴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느냐”고 호소했다. 이어 “조지 W 부시 대통령 방한 이전에 해결하지 않으면 큰일 날 수 있다”는 경고도 곁들였다. 30분 넘게 경청한 제프리는 “그 말에 공감한다. 대통령에게 소상히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면담 중 이 대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네그로폰테는 “즉시 들어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네그로폰테도 이 대사의 경고를 듣고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긴급 검토를 지시하겠다”고 약속했다. 10여 분간의 면담이 끝나자마자 미 국무부 내 동아시아·태평양국과 정보조사국, 법률자료실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했다. 그러는 사이 미 연방항공청(FAA)마저 BGN 결정에 따라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바꿨다는 뉴스가 나왔다.

밤잠을 설친 이 대사에게 반가운 정보가 들어왔다. 부시가 지난달 29일 백악관에서 열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관계자 간담회에 잠깐 들른다는 것이다. 낮 12시30분, 간담회장에 나타난 부시가 짧게 연설한 뒤 돌아서는 순간 이 대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가 “의전에 어긋나는 줄은 알지만 긴히 의논할 게 있다”고 청하자 부시가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두 사람은 걸으며 5분간 얘기했다. 이 대사가 “독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자 부시는 “아, 지리(Geographic) 문제. 나도 안다. 콘디(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와 협의하라”고 답했다. 이어 “의전에 어긋난 것 없다”고 웃어 보였다. 미 대통령이 외국 대사의 면담 요청을 즉석에서 받아 준 것은 이례적이다.

이 대사에게 이날 오후 또 다른 낭보가 들렸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만나자”고 한 것이다. 오후 4시30분, 힐 차관보는 집무실에 들어선 이 대사에게 레오 딜런 전문위원 등 BGN 관계자 4명을 소개했다. 전날 이 대사가 만나려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독도 표기 변경 조치의 주역들이었다. 이 대사가 “독도가 주권 미지정 지역이라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뭐냐”고 질문했다. BGN 측이 “분쟁 지역”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사는 “그런데 당신들 홈페이지엔 일본령으로 돼 있더라. 그래도 독도 표기 변경 조치가 정당하다고 강변할 수 있느냐”고 되묻자 이들은 대답을 못 하다가 “그 말이 맞다”고 물러섰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토론에서 힐은 “이 부분은 한국 주장이 맞는 것 같다”며 간접 응원했다. 힐은 토론이 끝난 뒤 이 대사에게 “최고위층이 관심을 갖고 협의 중이다. 내일 중 연락이 갈 거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2시30분쯤 이 대사는 백악관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제프리 NSC 부보좌관이었다. 그는 “부시 대통령 지시로 독도 표기를 원상회복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앞서 부시는 라이스로부터 독도 표기 문제에 대한 검토 결과를 보고받은 뒤 원상회복을 지시했다. 이날 오후 6시 BGN은 자체 데이터베이스인 지오넷에 리앙쿠르암(독도)의 소속을 한국과 공해로 되돌렸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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