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이 기억하는 이청준 “내가 잃어버린 고향, 그의 작품에서 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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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작가 이청준의 문학은 8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중 세 편을 함께 만든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서편제’(1993년)와 ‘천년학’(2007년)은 남도사람을 주제로 한 연작 단편 가운데 각각 ‘서편제’와 ‘소리의 빛’ 그리고 ‘선학동 나그네’가 원작이다.

임 감독은 70년대 말 잡지에 발표된 단편‘서편제’를 읽고 감동한 순간부터 영화화를 꿈꿨다고 돌이킨 바 있다.

오정해·김명곤 주연의 영화 ‘서편제’는 당대 한국영화 흥행신기록을 세우면서 우리 소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두 사람이 나눈 대담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삶 가운데 아픔, 고뇌가 쌓이고 맺힌 것이 한입니다. 그러나 맺힌 것만 있으면 그것은 원한입니다. 그것을 끌어안으면서 푸는 것이 진정한 한의 미학이고, 소리이며, 예술 아니겠어요.” 한 많은 인간에 대한 애정, 즉 휴머니즘은 두 사람의 작품세계에 꾸준히 이어지는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서편제’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세 살의 나이 차와 관계없이 작품은 물론이고 허물없는 우정으로 이어졌다. 영화 ‘축제’(96년)는 치매를 앓던 노모를 여의고 난 작가의 심경을 역시나 노모를 모시고 사는 감독과 주고받으면서 시작됐다. 영화와 소설이 나란히 진행되는 유례없는 공동작업이었다. 임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에서 작가는 원작뿐만 아니라 각본도 직접 맡아 촬영현장을 내내 함께 누볐다.

작가의 고향은 전남 장흥, 감독은 전남 장성이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작품에 대한 진지한 논의 외에도 은근한 유머가 흘렀다. 임 감독이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상대의 고향을 낮춰 짐짓 농을 던지면, 작가는 은발이되 마치 소년 같은 명랑함으로 이를 받곤 했다. 영화‘천년학’의 주요 장면은 작가의 고향인 장흥에 주막집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소설에서 묘사된 대로, 학이 날개를 펼칠 듯한 산자락과 물을 끼고 있는 곳이다. 이청준의 부음이 전해진 31일 임 감독은 “나는 이미 잃어버린 고향을, 그의 작품 속에서 만나곤 했다”고 말했다.

이웃사촌이기도 한 벗을 보내는 마음을 그는 일일이 토로하지 않았다. 감독은 “아쉽고, 원통하고, 아깝다. 할 말이 없다”며 영화 ‘축제’의 말미에 나오는 만가(輓歌)로 심경을 대신하고자 했다. “이 작가가 어머니를 보내던 마음이나, 이 작가를 보내는 마음이나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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