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 중국 최초의 권력형 절도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바오딩 인민체육광장의 2만인 대회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류칭산(왼쪽)과 장쯔산. [김명호 제공]

1952년 2월 10일 허베이(河北)성 인민법원은 스자좡시 당위원회(石家庄市委) 부서기 류칭산(劉靑山)과 톈진 지역위원회(天津地委) 서기 장쯔산(張子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직권을 이용해 비행장 건설과 수재복구 비용을 도용했고, 양곡을 도둑질했으며 불법 대출로 은행 돈을 훔친 죄였다. 고위 공직자가 직권을 이용해 공금을 도둑질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여자 사기꾼과 결탁해 회사를 차리고 건축자재를 비싸게 구입하는 수법으로 국고에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사치와 함께 사생활도 복잡해졌고, 공금으로 자동차를 구입해 공무와 상관없는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류칭산은 “우리는 천하를 얻었다. 이 정도야 어떻단 말인가”라고 했다. 검거 직전 사람들을 매수해 증거를 없앴다. 한 번에 378건의 증거물을 소각하기도 했다.

1951년 12월 중국공산당 화베이(華北)국이 주관한 두 사람의 형량에 관한 토론 참가자 중 552명 거의가 사형을 주장했다.

이들의 “권력형 절도(權力型 竊盜)” 보고서를 접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숙고했다. 항일전쟁 시절 류칭산을 잡기 위해 일본군은 현상금까지 내건 적이 있었다. 국공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정권 수립의 공로자인 이들에게 개조의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있었다. 마오가 결심했다. “이들은 높은 지위에 있었다. 큰 공을 세웠고 영향력도 컸기 때문에 처형을 피할 수 없다. 그래야만 앞으로 많은 간부들이 잘못을 면할 수 있다.”

2월 9일 밤 류칭산은 “나를 전형으로 삼아라. 두고두고 유용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했다. 장쯔산은 “할 말이 있어도 이미 늦었다. 피의 교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다음날 바오딩(保定) 인민체육광장의 2만인 대회에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와 함께 집행이 선포됐다. “머리가 상하지 않게 심장을 겨냥해라. 집행 즉시 안장하고 관은 국가가 부담한다. 이들의 친족은 반혁명분자가 아니다. 자녀들은 국가에서 돌본다”는 당 중앙의 지시가 전달되자 두 사람은 대성통곡했다. 류칭산은 붉게 충혈된 두 눈을 감아버렸고, 장쯔산은 사진기를 든 기자들을 향해 울부짖었다. “나를 찍어라. 그래서 후세들에게 교훈으로 남게 하라.”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