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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북카페] 혜초가 고선지 장군을 만났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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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김탁환 지음, 민음사, 각 388쪽·400쪽, 각 1만원

무려 1300년 전, 스무 살의 젊은 승려 혜초(704∼787)가 구법 여행을 떠난다. 불교 연구 산실인 인도 날란다 사원을 여정의 끝으로 삼은 대다수의 신라 승려들과는 달랐다. 혜초의 발길은 부처가 없는 땅까지 닿는다. 인도는 물론 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중국을 아우르는 긴 여정을 적은『왕오천축국전』을 남긴다. 8세기 인도·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작가는 혜초의 문장을 “돌 같다”고 말한다. 『왕오천축국전』의 원 문장을 현대어로 풀면 ‘여행자는 한 달 만에 구시나국에 이른다’와 같다. 한 달의 여정을 단 한 문장으로 단단히 압축하는 문체를 돌에 빗댄 게다. 단 일주일짜리 여행으로도 책 한 권을 뚝딱 펴내는 요즘 여행기들과는 딴판이다.

페사리국(인도의 바이살리 지방), 북천축국(인도 북쪽 지역)과 파사국(페르시아, 현재의 이란)을 거쳐 당나라 장안으로 이어지는 혜초의 여정. 신라에서 떠나 당나라 광주를 거쳐 인도로 향한 여정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민음사 제공]

무엇이 젊은 승려를 서쪽으로 끊임없이 향하게 했을까. 작가는 돌 같은 원문을 물 같은 문장력으로 술술 풀어낸다. 원문의 압축 사이에 숨어버린 혜초의 여정을 한껏 발휘한 소설적 상상력으로 촘촘히 채운다. 동시대를 살았던 신라 승려 혜초와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군 고선지(?~755)가 만난다는 설정이 가장 큰 줄기다.

대유사(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검은 모래폭풍에 휩쓸려 기억을 잃어버린 혜초와 병사를 잃은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의 만남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당대 최고의 여행가 신라 승려 혜초의 모습은 어땠을까. 혜초 전문가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가 서울여대 김미자 교수의 복식 고증을 거쳐 디지털 복원전문가 박진호씨와 함께 추정복원한 인물도. [중앙포토]

혜초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향찰(鄕札)로 여정을 기록한 양피지를 한 장씩 읽어간다. 그렇게 소설에선 고선지와 혜초의 만남 이후와 만남 이전의 여정이 중첩돼 펼쳐진다.

처음 책장을 넘길 땐 낯선 땅이름(『왕오천축국전』의 기록에 근거해 옛 지명을 사용했다)과 과거·현재의 중첩을 이해하느라 다소 속도가 더디다. 그러나 홀수 장은 소설적 현재, 짝수 장은 과거라는 사실만 파악하면 이내 속도가 붙는다. 고서에서 빌려 온 이야기임에도 벽안의 미녀, 주술 능력이 있는 흑인, 때가 되면 알라에게 절을 올리는 이슬람 교도 등 색색깔의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다채롭다. 로맨스·보물지도·미스터리, 피와 살이 튀는 전투 등 흥미거리도 골고루 담겼다.

로드무비를 보는 듯도 하고, 무협소설을 읽는 것도 같다. 원전에 근거한 팩트 1할에 작가의 상상력을 9할쯤 버무린 느낌이다. 그럼에도 ‘혜초 루트’를 따라 1년여 답사하며 고증한 작가의 땀방울이 뼈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만 반전 부분에서 약간 설득력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양피지가 담긴 걸낭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혜초와 고선지, 신라 상인이자 사기꾼인 김란수, 페르시아 무희 오름 등 주요 인물들은 여정의 막바지까지 달려간다. 소설은 그들이 목숨을 걸고 끝까지 향한 이유를 밝히지만 모든 이의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은 않는다. 기억을 찾으려, 혹은 뺏으려 양피지를 두 번씩 읽던 혜초와 김란수처럼 소설도 두 번쯤 읽으면 선명하게 이해될지도 모르겠다.

소설 외 여러 방향으로 뻗은 작가의 발자취는 공식 홈페이지(hyecho.minumsa.com)에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왕오천축국전』 반환운동 서명 게시판, ‘혜초 루트’를 답사한 코스와 여비를 정리한 짤막한 여행 가이드, 소설 예고편 동영상 등 쏠쏠한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담겼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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