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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공권력 횡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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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인들의 특질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화(和)의 정신」이다.조직내의 투쟁을 되도록이면 회피하고 질서와 안정을 지향하는 행동양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효고(兵庫)현 남부지진때 정부의 늑장대응으로 피해가 더늘어났지만 유족들은 조용히 울며 당국의 재건 계획에 따랐다.오움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살포사건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을 때도 시민들은 당국의 수사를 지켜보는 것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집단동조와 권위에 대한 복종을 뒷받침하는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이런 일본인들이 요즘 주택전문회사(住專)의 파산을 막기 위해 국민세금 6천8백50억엔(국민1인당 5천5백엔)을 투입하는 문제를 놓고 심상치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회와 대장성 앞엔 연일 데모대가 몰려 「민중봉기」의 피켓을흔들고 있고 제1야당 신진당은 국회예산위회의장을 2주일째 점거농성중이다.신문과 TV들은 국민들의 불만과 쟁점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논점은 세가지로 집약된다.첫째, 일본금융기관의 거대한 불량채권은 왜 발생했는가.둘째,불량채권 처리에 세금을 투입하는 것이옳은가 그른가.셋째,다수국민의 불만.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립여당은 재정투입 예산안을 통과시킬 것인가.이같은 의 문엔 각 조직과 개인의 이해에 따라 찬반이 갈리고 있는데 전례없이 감정론이고조돼 있다.
세금으로라도 빚잔치를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측은 불이 났으면 우선 불부터 끄고 봐야 할 것 아니냐는 논리다.부동산.
건설회사에 거액이 물려있는 주전(住專)이 파산하면 주전에 돈을댄 농협과 은행이 휘청거리게 된다.이것은 곧 일 본경제의 동맥인 금융시스템의 불안으로 직결돼 예금자보호와 국제신용에 치명타를 가하게 된다.그 이후의 일파만파를 생각하면 이 단계에서 하루라도 빨리 체질의 한계와 실상을 솔직히 국민에게 알리고 극약을 투여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세금으로 민간기업의 파산을 구제하는 것은 턱없다는 반대론이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이들의 주장은 주전에 대한지원이 미봉책일 뿐 결코 불량채권 전체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대장성이 발표한 일본금융기관의 불량채 권 총액은 40조엔.그러나 미국의 조사기관등은 많게는 1백40조엔까지 보고있다. 도대체 세금으로 어디까지 뒷감당해줄 것이냐는 물음이다.
차라리 금융기관도 일반기업과 똑같이 법에 따라 파산시키고 엄격한 책임추궁을 통해 사회적 혼란을 극복,체질개선의 계기로 삼자는 얘기다.
주요신문들의 사설도 양론으로 갈려있다.아사히(朝日).마이니치(每日)가 세금투입에 반대인데 반해 요미우리(讀賣).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불가피하다는 쪽이다.다만 양쪽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불량채권 문제를 이토록 방치,악화 시킨데는 관료와 정치인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는 점이다.때문에 일본국민의분노 뒤에는 관료의 무책임과 정책에 대한 불신,부실채권을 정쟁의 도구화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불쾌감이 짙게 깔려 있다.
사실 대장성은 일본경제가 언젠가는 다시 성장궤도에 돌아와 땅값도 오르고 세수도 증대될 것이라는 낙관론에 근거해 거품경제의위험과 전모를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리지 않고 그때 그때 눈앞의 처리에만 매달려온 감이 있다.그래놓고 이제 와선 시간이 가면 부담이 가벼워질 것이란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관료들의 이런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정치권마저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해결책을 미루는데 동조해 온 것은 늘 코앞에 닥친 총선거 때문이다.그래서 국회.관청의 무책임과 주전에대한 세금투입을 「공금횡령이 아니라 공권력횡령」이 라고 꼬집는사람도 있다.한국에도 비슷한 현상은 없을까.
전육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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