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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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자기 신상에 관한 일을 한마디로 추리고나니까 차라리 한심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무 것도 일궈 놓지 못한 몰골이다. -십여년 전 결혼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해 결국 이혼했다.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김아리영(金娥利英).이것이 너의 이력의 전부다.
아리영은 자신에게 말을 걸며 입술을 깨물었다.불모(不毛)의 땅을 스스로 확인하는 느낌이다.
이자벨도 아리영과 비슷한 30대 후반이다.그녀도 아이가 없기는 매한가지다.낳지 못한 것인지,낳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그녀에겐 성취감을 채워주는 「일」이 있고,그 일을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남편이 있다.로빈이라는 더할 나위 없는 남자 친구까지….
로빈 그린씨는 원래 스티븐슨 교수의 대학때 친구지만 요즘은 이자벨과 더 가깝다고 했다.미술품 수집가와 미술 연구가.관심을갖는 대상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라 한다.
아리영에겐 「자기 일」이 없다.애당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무엇이 자신의 적성에 알맞은 일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있는 것은 단지 미모(美貌) 뿐이다.
미모는 명성(名聲)과 버금갔다.어딜 가나 아리영은 저명인사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애써 일하여 이름을 드높일 필요가 없었다.미모가 아리영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아 온 셈이다.
『아이가 없어서 이혼을?』 이자벨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지었다.아이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입양(入養)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양자? 그렇지.나선생네 쌍둥이 아들 중의 하나를 양자 삼을수 있었으면 이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남편은 인공수태(受胎)할 것을 고집했었고 아리영은 그 인공행위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일찍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인공유 산시켰다.그런데 이번엔 남편이라 할지라도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씨를 받아 인공수태하다니….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닌가.
공항엔 아버지가 마중나와 있었다.코펜하겐에서 돌아왔을 때가 생각났다.사사건건 우변호사와 관련된 일들이 기억의 표면에 박혀떠오른다.못견디게 괴로웠다.
그에 대한 사랑이 미스터 조에 대한 것처럼 새하얗게 바래어지는 날은 언제인가.설령 정분이야 사라진다 해도 그가 아리영의 육신에 심은 강렬한 도취(陶醉)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서여사님께서 전화주셔서 뵙고 왔지.』 차를 운전하며 아버지가 넌지시 말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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