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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유럽에 간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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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퇴임을 앞두고 지난달 유럽 고별 순방에 나섰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서산에 지는 해 신세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권력무상을 절감했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요란하던 반미(反美) 시위대가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으니 말이다. 덕분에 그는 모처럼 유유자적하며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부시라면 치를 떠는 유럽인들에게 부시는 이미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존재다. 그들의 눈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에 쏠려 있다. 정확히 말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에게 집중돼 있다.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보다는 오바마가 44대 미 대통령으로 적임자고, 그것이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위해서도 낫다고 보는 유럽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국제여론을 무시하는 부시의 일방주의적 외교 행태에 유럽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부시에 대한 반감이 오바마에 대한 열광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얼마 전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5개국 국민 62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유럽인의 52%가 자신이 미국 유권자라면 오바마에게 투표하겠다고 대답했다. 매케인을 찍겠다는 응답은 15%에 불과했다. 특히 독일인은 67대6, 프랑스인은 65대8의 비율로 오바마에게 몰표를 던졌다.

유럽인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바마가 오늘부터 사흘간 유럽 3개국을 순방한다. 오늘은 베를린, 내일은 파리, 모레는 런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록 스타의 해외 순회공연 같다. 그가 베를린을 유럽 순방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상징적이다.

1963년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유럽 순방을 하면서 첫 방문지로 베를린을 택했다.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보이는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케네디는 “2000년 전 ‘시비스 로마누스 섬’(나는 로마시민)이라는 말이 최대의 자랑이었다면 오늘날 최대의 자랑은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나는 베를린시민)”라고 독일어로 외쳐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자유진영의 리더 이미지를 확실하게 심어준 것이다.

오바마는 오늘 베를린 시내 ‘승리의 탑’ 앞에서 연설을 한다. 19세기 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덴마크·프랑스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해 만든 높이 70m의 거탑 앞에 모인 베를린 시민들에게 대서양 동맹의 비전과 대외정책 구상을 밝힐 예정이다. ‘21세기의 검은 케네디’라는 이미지를 투사(投射)하기 위한 상징 조작이다.

외교안보 분야의 경험 부족은 오바마의 최대 약점이다. 베트남전 영웅인 매케인에 비해 열세가 뚜렷하다. 유럽 순방에 앞서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장(戰場)을 찾은 것도 군 통수권자 이미지를 각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찾은 것은 미 외교정책의 승부처가 어딘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내치와 마찬가지로 외치에서도 오바마는 통합의 정신을 추구하며,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찾겠다고 밝히고 있다. 유엔 등 국제기구를 존중하고, 중국·인도·러시아 등 새로운 플레이어들과의 협력에 무게를 두겠다고 말한다. 하드파워보다 소프트파워를 강조하고 있다. 북한이나 이란 같은 불량국가 지도자와도 필요하다면 직접 만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취임 후 16개월 내 이라크 주둔 미군 철수는 핵심 공약이다.

오바마가 외교안보 분야 경험부족이란 약점을 딛고 유럽인들의 바람대로 당선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선되더라도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도 두고 볼 일이다. 무력개입을 둘러싸고 강온파로 갈린 이란 핵 문제에 대해 오바마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공약대로 자유무역협정(FTA) 재검토를 실행함으로써 위기의 세계경제에 보호주의 망령을 불러올 것인가. 이 두 가지가 그에 대한 평가를 좌우하는 척도가 될 전망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 있다. 하지만 누가 되더라도 부시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유럽인들에게는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