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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지리기행>19.명성황후와 일본대사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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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는 그동안 세계화란 말을 많이 써왔다.지구촌이니,지구 가족이니 하여 어떻게 보면 범인류애적이라 할 수 있는 고상한 용어들도 이제는 범상한 말이 됐을 정도다.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코스모폴리터니즘이란 말을 쓰면 그럴 듯했 지만 식민지배를 받던 나라의 지식인층들이 그런 사상을 표방하면 한심한 것으로 비쳐지던 때도 있었다.세상 참 많이 변한 셈이다.
우리가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던 그 시간, 이웃나라에서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이란 것을 선포하고 양식있는 자기나라 사람들도 잘 믿지 않는 독도(獨島)영유권을 문제삼고 나왔다.세계화란 결국 인류가 다 같이 번영해보자는 의도일 것이 니 말하자면인(仁)일 것이오,배타적이란 내것만 챙기겠다는 이(利)의 발로일 것이다.
인은 대의(大義)요,이는 범속(凡俗)이다.누가 있어 감히 범속을 대의 위에 있다 할 수 있으랴.
그러나 모든 일에는 다 시의(時宜)가 있는 법이라 아무때나 대의를 주창할 것은 아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패업(覇業)을 좇던 송양공(宋襄公)이 초(楚)나라 군대와 싸울 때의 일이다.
그는 대세를 판가름지을 수도 있는 큰 싸움에 임해 인의를 앞세워 적군이 진세(陣勢)를 펼칠 때까지 기다리다 결국 승기를 잃고 대패하고 말았다.적이 강을 건너는 순간 공격했다면 충분히이길 수 있는 싸움을 공연히 인의를 내세우다 망국패가(亡國敗家)의 길을 자초하고 만 것이다.그 소식을 전해들은 송나라 사람들은 하도 기가 막혀 연신 탄식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
전쟁은 인의가 아니다.인의로써 할 수 있는 것이 싸움일 수 없다는 뜻이다.우리가 새겨둬야 할 고사다.
훗날 뒷사람이 기록하기를 『송양공처럼 인의를 찾다가는 도척(盜척)과 문왕(文王)도 분별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뿐만 아니다.송양공은 그 전에 당시 조그만 나라였던 증()나라 임금을 사로잡았을 때는 자신의 계책을 위해 그를 가마솥에 잡아넣고 삶아죽인 인물이다.안(內)과 작은 것(小)에는 가혹하고 밖(外)과 큰 것(大)에 대범한 것은 인의가 아니라 위선이거나 비겁일뿐이다.이웃나라가 가슴속 깊이 품어두어야 할 교훈이다.
지난해 3.1절에 나는 다른 지면에서 현 일본대사관 입지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그 풍수적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서울의 주산 북악의 정기는 경복궁이라는 내명당에서 궁궐을 조성해 그 기운을 살리고 그 경계는 동십자각 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합수처에서 막음을 하는 것이며,이어 그 합수점을건너 지금의 일본대사관 터에서 다시 정점을 이루며 서울 외명당(外明堂)으로 정기를 공급해주는 체제를 갖는 것인데,바로 그곳에 일본대사관이 들어선 것은 잘못이다 .게다가 일본대사관 터는북악과 근정전,광화문,환구단(현 웨스턴 조선호텔옆.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곳),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중심 축선(軸線)에서 바로 빗겨난 곳이며 내명당수가 합수를 이뤄 서울의 명당수인청계천으로 이어나가는 바로 곁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악의 정기가흘러나가는 지맥(支脈),즉 부차적 혈장(穴場) 의미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상식에 비춰서도 그 입지가 잘못된 것인즉 그 내용은 이러했다.『그 터가 바로 그들의 선조가 한 나라의 왕비를 참살하고 그 나라를 빼앗았으며, 수많은 애국지사를죽여버린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였다는 것은 일본의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히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었다.그들이 아무리 의도없이 우연히 그런 입지처를 선정했던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범죄현장을 쉼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인의있는 군자의 대도(大道)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그들은 또한 그들의 과거 조선 지배의 대표적 상징물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역시 쉼없이 바라보고있다.그 앞에는 끊임없는 일본인들의 인파가 물결치고 있다.비단풍수를 동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본 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민족이 어떤 식으로 마음 아파하는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생각한다.나는 일본이 군자의 대도를 살리고 큰 나라로서의 대범함을 보이기 위해 일본대사관 터를 최소한 서울의 4대문 안 땅은 피해 그 바깥쪽으로 옮겨갈 것을 권한다.가까운 장래에 대사관 이전이 어렵다면 우선은 대사관 건물 앞에 경복궁을 바라보는방향으로 옛 역사에 대한 사죄탑(謝罪塔)이라도 하나 세워놓고 볼 일이 아니겠는가.』 훗날 관보(官報)에 기록된 그들의 그날죄상은 이렇게 돼있다.『마침내 흉도들은 피신한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를 찾아내 등뒤에서 칼로 허리를 난도질해 살해하고 우물에 던졌다가 다시 끌어내 비단 이불에 휘말아 판자 위에 옮겨경복궁 후원 숲속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태워 산속에 묻었다.이것이 남의 나라 왕비를 참혹하게 시해한 국제범죄인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그러나 당시 일본 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 등 연루자 48명은 결국 증거 불충분이란 이유로 모두 면소(免 訴),석방됐다.』일본은 증나라 임금을 팽살(烹殺)한 송양공의 비겁과위선을 따른 꼴이었다.
흔히 세간에서 민비(閔妃)라 불리는 명성황후는 철종2년(1851)에 여주군근동면섬락리(蟾樂里.현 여주군여주읍능현리능말)에서 태어났다.능말 뒤에 있는 여양부원군 민증유의 무덤이 금두꺼비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金蟾望月形)의 명당이라 해 이런 마을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그를 위해 향교말 북동쪽에 있는 늪을 섬늪이라 했을 정도로 탁월한 터라고 하지만 황후의 일생을 보라.
땅의 소응이 이 경우 무슨 소용이 있는가.
뿐만 아니다.자기의 며느리며 황후였던 그녀의 시해에 자의든 타의든 가담하고 만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어떠한가.예산군덕산면가야산 자락에 의지하고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소는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는 대명당이 아닌가.그 역시 패가망국하고 말았다.풍수에서의 땅은 단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하던 필자의 말은 여기서도 예증되는 셈이다.
경복궁 한쪽 구석에 외로이 서있는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라는 석비 앞에서 일본대사관 건물 쪽을 바라본다.이런 자리에서의 감회가 고작 세상사 덧없다는 정도라면 송양공의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인의와 다를 바가 무어랴.
용서하라,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미국인들의 말.하지만 위선이 아닌 실질적인 용서는 상대가 그 죄를 참회하며 애걸할 때나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전서울대교수.풍수지리연구가〉 최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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