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르코지 통합의 기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요즘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없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 니콜라 사르코지(사진) 대통령이다. 지지율은 취임 초 50%대보다 크게 낮은 30%대다. 그런 그가 21일(현지시간) 대통령 권한 강화 등을 포함한 헌법개정안을 상·하원 합의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통합 리더십이 한껏 돋보인 정치적 홈런이었다. 프랑스 5공화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은 지지율을 보이는 ‘약체 대통령’이 국회 재적 5분의 3의 동의가 필요한 개헌안을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현재 상·하원 908석 가운데 여당인 대중운동연합은 52%다. 그러나 개헌투표에선 60.15%(539명)가 찬성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사르코지식 열린 정치와 대리 정치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인기 없는 그의 힘으로는 지금 개헌은커녕 어떤 개혁도 할 수 없지만, 취임 초부터 펼쳐온 좌우 벽 허물기와 이를 통한 대리 정치가 고비 때마다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대리 정치로 개헌=개헌은 물론 사르코지의 생각이었지만 실제로 추진한 건 그가 아니라 ‘국가 기구 현대화 위원회’라는 기구였다. 지난해 7월 출범한 이 위원회는 우파 원로인 에두아르 발라뒤르 전 총리가 위원장을 맡았다. 여기에 대표적인 좌파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사회당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낸 자크 랑이 참여해 큰 힘을 보탰다. 좌우가 두루 참여하는 모양새를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자크 랑으로서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이미 사르코지의 열린 정치가 무르익은 뒤라 부담은 덜 했다. 첫 내각에 좌파의 베르나르 쿠슈네르가 외무장관에 올랐고 중도파의 에르베 모랭은 국방장관에 중용됐기 때문이다. 논공행상을 기대했던 우파 정치인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로 좌파와 중도파가 득세하는 모양새였다.

사회당은 최근 개헌안에 대해 당론 반대를 결정했지만 자크 랑은 “나는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공언했다. 치열한 표 다툼을 벌이던 시점에서 사르코지에게는 큰 힘이 됐다. 좌파 원로가 적극 찬성하면서 사르코지의 일방적인 개헌이라는 지적이 상당 부분 탈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크 랑은 지난해 대선 당시 여러 차례 TV 토론에 나와 사르코지를 비난하던 사람이었기에 극적인 효과는 더욱 컸다. 지난해 사회당 대선후보였던 세골렌 루아얄은 개헌안이 통과된 뒤 비난의 화살을 사르코지가 아닌 자크 랑에게로 돌렸다. 그는 자크 랑을 겨냥해 “배신의 길을 걸으면 치욕의 강을 건너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루아얄은 이미 정치적으로는 사르코지에게 밀렸다는 지적이 사회당에서도 나온다. 사회당의 마뉴엘 발 의원은 “사회당이 (당론 반대를 함으로써) 개혁에 참여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했다. 사르코지의 대리 정치는 올해 초 성장촉진위원회가 300여 개의 프랑스 경제 개혁 과제를 발표할 때도 빛을 발했다. 과제에는 프랑스에서는 좀처럼 떠올리기 힘들었던 경쟁 시스템이 포함됐다. ‘사르코지 안’이었다면 극렬한 반대가 있었겠지만, 자크 아탈리 위원장이 내놓은 안이었기에 무난하게 넘어갔다. 아탈리는 대표적인 좌파 정치인이자 경제학자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내각 대표성 강화=이번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의 권한 강화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취하는 프랑스는 총리가 의회에서 정부 정책과 법안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대통령이 직접 의회에 나서게 됐다. 총리의 중요한 권한이 대통령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프랑스는 좌·우파가 나란히 대통령과 총리를 할 수 있는 ‘동거 내각’이라는 정치 전통을 갖고 있어 총리의 권한 축소는 의미가 더욱 크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