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 기자의 영화? 영화!] 시골학교의 ‘청춘 판타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복식학급(複式學級)이라는 말 자체는 낯선데, 그게 뭔지는 사실 다들 아시는 겁니다. 서로 다른 학년이 같은 반인 거죠. 학생수가 적은 시골학교에서 볼 수 있는 반 편성입니다. 일본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24일 개봉·사진)은 이런 시골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생, 중학생 각각 한 반씩, 모두 합쳐 전교생이 달랑 여섯 명뿐인 학교지요.

주인공은 이 학교의 중2 여학생 소요(가호)입니다. 시작부터 꽤나 부산을 떤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동갑내기 전학생이 오는 모양입니다. 소요에게는 학창생활에서 처음 만나는 동급생이니 들뜰 만도 합니다. 그동안은 오줌싸개 초등학교 1학년생을 비롯, 모두 소요의 동생들이었죠. 그래서 소요에게 학교생활이란 동네아이들의 맏언니 노릇을 의미합니다.

도쿄에서 온 전학생 오사와(오카다 마사키)는 고맙게도 꽃미남입니다. 누가 먼저 본격적으로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닌데, 소요와 오사와는 점차 아이들 사이에 공인된 커플로 자리를 잡습니다. 미리 밝혀두지만, 이 풋사랑이 영화의 핵심은 아닙니다. 사실 중학생들의 연애가 별로 대단할 리는 없잖아요.

게다가 소요는 꽤나 독특한 소녀입니다. 이참에 맏언니 노릇에서 벗어나 모처럼 생긴 남자친구 오사와랑 마음껏 놀러 다닐 법도 하건만, 마음 씀씀이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골에서의 삶에 대한 생각도 그렇지요. 맘에 드는 옷 하나를 사려고 해도 이렇다 할 쇼핑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모양을 바꾸려 해도 마을에 하나뿐인 이발소의 솜씨는 별로 기대할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갑갑증을 느끼던 소요가 정작 대도시 도쿄로 수학여행을 가서는 그 번잡함에 숨이 막혀 일시적인 패닉 상태를 겪습니다.

요즘 주변에서 흔히 보는 아이들과 비교하면, 소요의 생활은 흡사 천연기념물처럼 보입니다(이 영화의 일본어 원제이자 원작만화 제목이 마침 ‘천연 꼬꼬댁’입니다). 학교가 파하면 학원은커녕, 동네아이들이 나란히 산길을 넘어 바다로 수영하러 가는 게 일상이니까요. 아침 등굣길 역시 길목마다 서로 만나서 모두 함께 학교로 가는 게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일종의 판타지 같은 영화입니다. 아이들이 여섯 명뿐인데도 마을에는 활기가 넘칩니다. 서로 살림살이를 뻔히 아는 처지입니다. 도시 생활의 에티켓을 기준으로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간섭도 있지마는, 그 속에도 남모를 비밀이 생겨나는 것이 역시나 사람 사는 동네답습니다. 영화라는 게 본래 판타지의 장르라면, 이런 판타지라고 안 될 것도 없지요.

영화 막판에 소요는 멀리 떨어진 고교로의 진학을 앞두고, 이제껏 지내온 교실을 둘러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요의 첫사랑은 미소년 오사와가 아니더군요. 다른 데서 경험하기 어려운 이 진기한 시골학교 시절의 소중함을 소요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더군요.

이후남 기자

▶ 중앙일보 라이프스타일 섹션 '레인보우' 홈 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